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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냐면] 그런 ‘당신’이 학교폭력을 비난할 수 있는가
황주환 교사·<아주 작은 것을 기다리는 시간> 저자
성적 압박에 어머니를 살해한 고등학생, 친구를 죽음으로 몰아간 중학생 등으로 교육을 성토하는 목소리가 넘쳐난다. 무슨 진단과 처방을 덧붙일 것이 있겠나 싶을 정도로 많은 분석과 대책들이 쏟아졌다.
그런데 이 참담한 몇몇 사건은 우리 교육병증의 일부일 뿐이다. 비록 사건화되지 않았지만 학교는 이보다 더 광범위하고 심각한 상태다. 이미 수많은 아이들이 자살해왔고, 모든 아이들이 경쟁교육과 억압적인 학교문화에 신음하고 있다. 바로 나와 당신의 평범한 아이 모두가 병들었다 해도 결코 지나치지 않다. 매일 학교에서 생활하는 나는 이를 훨씬 더 심각하게 생각한다.
수행평가 시간에, 학습 장애가 있어 언제나 전교 꼴찌인 학생을 배려하려 했다. 그런데 아이들이 날선 고함과 손가락질로 나를 질타했다. ‘왜 그 아이만 특별대우 해주느냐’며 교사에게 퍼붓는 야유로 교실은 한순간 아수라장이 되었다. 아이들의 조롱과 이죽거리던 눈빛을 나는 너무나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다. 끔찍한 경험이었다. 자신들과 경쟁조차 되지 않는 장애 급우에게 날것의 감정을 그대로 내보인 그들은, 유별난 아이들이 아니었다. ‘평범한’ 아이들이었다.
이보다 더한 당혹이 일상 일어나는 곳이 오늘의 학교다. 급우들간 사소한 일에도 비난, 욕설, 증오, 배제, 집단 가해가 일상이 되었고, 서로 할퀴는 날선 감정들이 너 나 할 것 없이 아이들 밑바닥에 끈적끈적하게 눌어붙어 있다. 그런데 이들은 유별난 아이들이 아니다.
연중 4번의 정기시험, 과목마다 치르면 20회나 되는 수행평가, 그리고 각종 일제고사, 그 일제고사를 대비하는 학교별 시험까지, 일년 내내 시험에 포위된 아이들. 주입식 암기와 석차만이 자기 가치로 평가되는 학교에서, ‘너는 타인의 고통을 어떻게 상상하느냐’는 물음이 무슨 소용인가. 대개의 어른들은 ‘나도 그런 학교를 다녔다’며 이를 청소년기 성장통으로 치부하곤 한다. 그러나 단언하건대, 오늘의 학교는 예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훨씬 더 잔혹하다. 궁금하면 다시 한번 다녀보시라. 학교는 지옥이다.
그런데 학교의 야만을 누구보다도 잘 아는 나도, 딸을 학교에 보내고 있다. 감정이 풍부하고 결이 고운 딸아이가 중학생이 되자 시험에 치여 ‘짜증난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산다. 아이가 메말라가는 것을 안타까워하면서도 이 지옥 같은 버스에서 내리라고 못하는 것은, 공포 때문이다. 미친 듯이 질주하는 버스에서 자녀를 빼내지 못하는 것은 ‘학교 밖의 사회는 더 지옥’이기 때문이다.
오늘의 학교는 예전과 비교할 수없을 정도로 훨씬 더 잔혹하다
궁금하면 다시 한번 다녀보시라 자본과 권력의 폭력이 일상화된 한국 사회. 학교경쟁에서 낙오가 곧 사회적 낙오가 되는 두려움 때문에, 대중은 출구 없는 경쟁교육에 목을 매고 있다. 그래서 학교는 폭력사회의 서바이벌 게임이다. 즉 인간대접 받지 못하는 비정규 노동자가 되지 않으려고 옆의 친구를 밟고 올라서는 순서를 정하는 곳이 아닌가? 한때 공부 못했다간 평생의 생존까지 위협받으니 어떻게든 앞자리를 차지해야 하고, 그렇게 등 떠미는 엄마를 아이는 흉기로 찔렀고, 또 밤낮 공부해도 결국 뒷자리로 내동댕이쳐진 아이들은 자기보다 힘이 약한 급우를 다시 저 아래로 던져버린 것이 아닌가? 이것이 바로 한국 사회의 모습과 무엇이 다르냐고, 나는 물어보는 것이다.
일상화한 사회폭력이 학교까지 밀려들어온 것뿐이다. 그런데도 한국 사회의 그 차별과 폭력에는 무감한 채 단지 학교폭력에만 분노하는 ‘당신’이야말로 위선이거나 무지라고, 나는 말하는 것이다. 오래전 추운 겨울에도 난방 기름을 제때 지급하지 않는 학교의 불합리를 지적한 적이 있었다. 학교장은 기름 절약을 교육으로 훈시했지만 나는 왜 매년 추위에 떨어야 하는지 궁금했다. 학교 예산서를 찾아 확인해보니 난방비는 충분했다. 그런데 어느 누구도 학교 예산을 문제 삼지 않은 채 아이들에게 기름 절약만을 말하며 그것을 교육이라 여겼다. 내가 이 일화를 글로 썼던 것은 무감한 것은 바로 우리 자신이라는 것, 그리고 그 무감함이 바로 폭력이라는 것을 말하고 싶어서였다. 고통의 배후를 살피지 않는 것이야말로 폭력의 시작이라고. 교육은 언제나 정치의 영역이다
그래서 총선과 대선이 있는 해에
다시 힘을 얻고자 한다 이 일화를 접한 사람들은 예상했던 대로 교사들의 기만을 힐난했다. 한국 사회에서 교육 문제는 누구나 비판하기 쉬우니까! 그런데 오늘은 교사인 내가 ‘당신’에게 한번 묻고 싶다. 학교폭력을 그토록 비판하는 당신이, 쌍용자동차와 한진중공업이 ‘공부 못한 찌질이’에게 가한 폭력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지 말이다. 세습왕조처럼 기업을 사유화한 재벌들이 공부 잘한 판검사 급우들과 결탁해 우리 옆의 동료를 잔인하게 왕따시키지만, 당신은 왜 그런 금권의 폭력에는 무감하면서 기껏 아이들의 폭력에 대해서만 분노하는지 물어보는 것이다. 지옥 같은 학교를 벗어버리고 그냥 노동자로 살아가고 싶지만 노동조합이라는 말에도 날것의 적대감을 드러내는 ‘당신’들 아닌가? ‘한때 공부 못했다’는 이유만으로 평생 저임금 노비로 살아가야 하는, 지옥 같은 사회를 당연하게 여기는 당신이 바로 지옥 같은 학교를 초래한 것과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다시 한번 말하자. 경쟁에 내몰린 모든 아이들이 참담한 비행을 저지르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모든 것은 너 하기 나름’으로 이 사태를 덮을 수도 있을 것이다. 사회의 구조적 폭력에는 애써 외면한 채 개인의 노력만을 요구하는 것은 언제나 있어온 기만이니까. 그렇다면, 그 많던 난방 예산에 대해서는 묻지도 않고 기름 절약만을 교육으로 내세우는 우리 교사들처럼 기만적이기는 당신도 마찬가지라고, 나는 단지 당신의 그런 기만과 위선으로 교육해법을 말하지 말라는 것이다. 이제 학교 문제는 학교 안에서 해결할 수 없다는 것에서 교사인 나는 힘이 빠진다. 학교폭력을 해결하기 위해서 당장 상담교사를 확충하고 경쟁교육의 핵인 일제고사를 폐지해야 한다. 나아가 (국립)대학 무상교육과 평준화로 교육 공공성을 확보하고 입시경쟁을 완화해야 한다. 그런데 그것만으로는 안 된다. ‘학교 밖을 덜 지옥’으로 만들어야 한다. ‘한때의 석차’보다 ‘사회노동’이 대접받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 즉 노동임금이 정직한 사회를 외면한 어떤 교육개혁도 성공할 수 없다. 이는 정치적 선택이다. 각종 사회적 차별을 해소하는 것이 왜 교육 문제와 연관되는지 유권자들은 깊이 생각해야 한다. 교육은 언제나 정치의 영역이다. 그래서 총선과 대선이 있는 해에, 다시 힘을 얻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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