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2.03.12 19:33
수정 : 2012.03.12 19:33
1998년 국적법 개정 이전 국제결혼이
제도적으로 미흡할 때 발생한 문제…
나 몰라라 대처는 국가의 직무유기
“위장결혼으로 인한 무국적자에게 인권은 없다.”
대한민국 정부의 분명한 입장이다. 국가인권위원회는 2011년 9월1일 법무부, 외교통상부, 보건복지부 등 정부기관에 ‘위장결혼으로 인한 무국적자 인권증진 방안’을 권고했다. 인권위는 위장결혼으로 국적이 취소된 채 10여년 동안 무국적자로 한국에 체류하면서도 기존 국적을 회복하기 어려워 출신국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사람들의 기본적 권리 보장 차원에서 권고 결정을 내렸다. 그러나 한국 정부는 위법한 행위로 무국적자가 된 사람들의 체류를 허용할 경우 위장결혼을 방조할 우려가 있다는 등의 이유를 들어 인권위 권고를 수용하기 어렵다는 의견을 통보해왔다고 한다.
따라서 위장결혼으로 한국 국적을 취득한 외국인들은 한국에서 10년 넘게 살더라도 그 사실이 드러나면 법무부 장관에 의해 국적을 박탈당할 수 있고, 한국 사회에서 거주하는 한 헌법이 명시한 인권을 충분히 보장받을 수 없다. 이번 ‘권고 불수용’을 통해 위장결혼으로 인한 국적취득은 내국인에 피해를 주고 국가를 기만한 행위로서 도저히 용서받을 수 없는 중죄인이라는 당국의 시각이 분명하게 드러났다. 그러나 정부의 ‘권고 불수용’은 모든 책임을 힘없는 개인에게 떠넘기고 정부는 아무런 책임도 지지 않겠다는 태도나 다름없다. 그렇다면 과연 한국 정부는 아무런 책임도 없는 것일까?
아마도 당사자의 이야기를 직접 들어보지 못한 사람들은 법무부의 이런 주장을 그대로 믿을 것이다. 하지만 한국 사회가 좀더 성숙한 판단을 내리기 위해서는 당사자 의견을 경청하고 인권의 관점에서 어떤 문제가 있는지 진지하게 고민할 필요가 있다.
중국동포 김숙희(가명·46·여)씨는 1996년 결혼으로 한국에 들어와 2003년 5월께부터 현재까지 무국적자로 생활하고 있다. 김씨의 경우 한국 생활이 벌써 16년째이고, 무국적자 생활만 8년이다. 무국적자 김씨는 자기 이름으로 취업활동을 할 수 없고, 통장을 만들 수 없고, 건강보험에 가입할 수 없다. 심지어 현재 동거하는 한국인과 결혼수속을 밟고 싶지만 신분 자체가 없기 때문에 혼인신고를 할 수 없다. 한국 정부의 인권위 권고 ‘불수용’ 답변을 접한 김씨는 “저는 언제까지 무국적자로 살아야 합니까? 위장결혼 판결에 따라 벌은 벌대로 다 받았는데, 정말 너무하는 거 아닙니까?”라며 울분을 토했다.
김씨와 같은 처지의 중국동포 여성 12명은 2009년 3월 국가인권위에 진정서를 냈다. 당시 필자는 ‘무국적자 구제를 위한 시민모임’을 결성하고, 국회 김춘진 의원을 통해 입법 공청회도 열었다. 하지만 지금까지 무국적자에 대한 처우는 달라진 것이 없다. 이제 김씨가 한국에서 할 수 있는 일도 없다.
한국 정부의 무관심 속에서 김씨와 같은 자포자기의 삶은 계속된다. 한국이 말로만 인권국가를 지향하는 것이 아니라면 엄벌의 효과만 고집할 게 아니라 이쯤에서 정부 차원의 노력을 다했는지 뒤돌아봐야 할 것이다. 엄밀히 말해서 위장결혼으로 인한 무국적자 문제는 1998년 6월 국적법 개정 이전 국제결혼이 제도적으로 미흡했을 때 발생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한국 정부가 지금처럼 나 몰라라 하는 식으로 대처하는 것은 국가의 직무유기와 다름없다.
김용필 <동포세계신문>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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