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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2.05.21 16:42 수정 : 2012.05.21 16:54

김만권/뉴욕 뉴스쿨 정치학과 박사과정

사랑은 정치의 기반이 될 수 없어

서로를 객관적으로 볼 수 있나

당권파 지도부에 묻고 싶다

통합진보당 사태가 일어나고 <오마이뉴스>와 <프레시안>에 기고를 했습니다. 두 기고문에서 주체사상을 믿는 이들이 왜 민주주의자 혹은 진보일 수 없는지에 대해 강조하는 사이 ‘주사파’라는 용어를 불가피하게 썼습니다. 사실 이 용어를 쓰면서도 조금은 맘에 걸렸습니다. 지금 현 상황은 이 주사파라는 말은 ‘당권파’나 ‘자주파’ 모두를 의미하는 것이나 다름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당권파에도 비자주파가 있을 수 있고, 자주파 내에도 주체사상과 거리를 두는 비주사파가 존재합니다. 이 용어 하나에 이런 비자주파나 비주사파들이 모두 한꺼번에 매도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이런 것들을 일일이 설명할 수 있는 공간을 찾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많이 불편했습니다. 맘을 불편하게 한 건 이런 집단의 차이뿐만이 아니었습니다. 이 집단 내에는 저 같은 자유주의자들이 가장 소중히 여기는 개인들이 있습니다. 통진당 사태로 인해 빚어진 분노 앞에 그 개별적 존재들이 이 용어 하나에 아무런 구별 없이 모두 묶여들 수 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더 많이 불편했습니다.

하여 더 마음을 다지고 이런 개인들을 소중히 하는 마음으로 당권파를 바라보았습니다. 불 행히도 제 눈과 귀로 제대로 확인할 수 있는 당권파의 모습은 언론에 노출된 지도부에 있는 제한된 이들뿐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지도부에선 제가 소중히 여기는 개인을 전혀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집단 속의 개인은 저마다 다른 존재이고, 정치집단에서 개인은 자기만의 다른 견해로 구별이 됩니다. 그러나 언론에 노출된 이정희, 이석기, 김미희, 김재연, 이상규와 같은 지도부나 당선자들의 발언은 하나 같이 똑같았습니다. “부정선거는 없었다”, “사태해결은 당원총투표로 해야한다”, “비대위를 인정할 수 없다”, “폭력사태는 잘못되었지만 그 원인 제공은 심상정 대표의 비민주적 처사때문이다”, “일반 국민의사보다는 우리 당원이 더 중요하다” 등. 다른 관련 지도부의 의견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저는 서로 다른 각각의 개별지도자들이 어떻게 이토록 똑같은 입장을 지닐 수 있는지 조금 의아했습니다. 사실 ‘당파이익 지키기’라는 말로도 설명이 안 될 만큼 이들의 말은 한결같았습니다. 특히 이들 발언에서 인상적이었던 부분은 자파의 당원 동지에 대해 묻어나는 뜨거운 애정이었습니다.

이 뜨거운 애정은 사실, 평범한 동료애로 설명이 될 수 없을 만큼 강해 보였습니다. 사회적 소수자로서 어려운 시간을 함께 건너왔기에 우리는 서로 배신하지 않는다는 서로간의 강력한 결속이 한눈에 보였습니다. 이렇게 표현해도 좋다면, 이들은 서로 사랑에 빠져 있는 듯 했습니다. 철학자 강신주 선생님은 진보의 가치가 ‘사랑’(love)이라 말한 적이 있습니다. 구성원 간의 깊고 넓은 감성적인 유대는 서로를 뜨겁게 지키고 사랑하는 한 집단을 만들고 있었습니다. 이 사람들이 하나의 공적집단만 아니라면 부러운 결속력이고 뜨거운 애정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인간의 조건>에서 한나 아렌트는 강신주 선생님과는 달리 사랑은 정치의 기반이 될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 이유로 사랑에 빠진 사람은 눈이 가려진다는 점을 들었습니다. 이 눈멂은 사랑하는 사람들 사이에 서로를 인정하고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거리가 없애버립니다. 깊은 사랑에 빠진 연인들은 서로의 자아를 지우고 상대방에게 몰입합니다. 이렇듯 사랑은 나를 지울 뿐만 아니라 때로는 상대방에게 상대방을 지우라고 요구합니다. 흔히 연인들이 꿈꾸는 많은 사랑이 바로 상대방이 자아를 지우고 ‘나’에게 몰입하는 것입니다. 많은 경우 사랑에서 상대방의 실수는 그저 사소한 일일 뿐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과오는 그렇지 않은 사람들의 과오보다 작아 보입니다. 그렇기에 사랑은 관계를 맺는 사람들 간에 객관적인 거리가 필요한 정치에선 적절한 기반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이 때문에 많은 정치철학자들이 우정(friendship)이 정치의 기반이 되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우정은 상대방에게 내가 원하는 것을 집착하며 강요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정은 상대방을 있는 그대로 인정합니다. 이 거리 때문에 때로 친구들은 상대방의 실수를 객관적으로 지적할 수 있고, 이런 지적을 자신을 위한 것이라고 믿고 상대적으로 쉽게 받아들입니다. 정치에선 바로 이 인정의 거리로 인해 각 구성원이 각자 독특한 견해와 입장을 지닌 구별되는 개인으로 존재하게 되며 궁극적으로 개인성이 형성됩니다.

하지만 어떤 이들은 이렇게 좋아 보이는 우정을 두고도 우려합니다. 정치에서 지나친 우정은 적을 만들어내기 때문입니다. 대표적으로 칼 슈미트는 정치적인 것이란 적과 동지의 구분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누가 나의 적이고 누가 내적의 적인지를 알 수 있다면 누가 나의 친구인지 알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어떤 철학자들은 친구에서도 더 거리를 넓혀 동료애를 이야기하기도 하고, 같이 스포츠 경기를 뛰는 팀원의 결속력 정도가 정치에 적합하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정이든, 동료애든, 스포츠팀원의 결속력이든 정치적 개별 존재들 간에 어느 정도 거리가 있어야 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저는 하나같이 똑같은 입장을 내놓고 있는 관련 당권파지도부 인사들에게 묻고 싶습니다. 구성원 간에 서로를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거리를 두고 있냐고. 너무 서로를 사랑하고 아껴서 동지들이 저지른 실수가 사소해 보이고, 덮어주고 싶고, 허물이 드러나도 막아주고 싶은 것은 아닌지. 그래서 폭력행사가 잘못되었다고 개별적으로 인터뷰에선 말하면서도 공식적으로 폭력행사에 대해 사과성명 등을 내지 못하는 건 아닌지. 그렇다면, 그 거리 없는 사랑에서 깨어나 동료들이 한 일을 거리를 두고 한번 바라보라고 부탁하고 싶습니다. 그렇게 할 수 있다면, 심상정 의원이 설령 비민주적으로 의사를 진행했다하더라도 우리가 그래선 안됐다고, 심상정 의원의 비민주적 의사진행이 결코 우리의 폭력을 일으킨 원인이 될 수는 없다고 누군가 한 사람이라도 다르게 말 할 수 있지 않을까요? 그렇게 객관적인 거리를 두고 다른 목소리, 다른 견해를 낼 수 있다면 여러분은 더 이상 아무런 개별성의 구별 없는 집단 속의 존재가 아니라, 우리 사회가 아끼고 지켜야 할, 이정희 의원이 말하는 우리 사회가 지켜야 하는 무고한 한 사람으로 빛나기 시작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그대들을 무작정 비난하는 사람이 있다면, 개인 하나 하나를 소중히 여기는 사람들이 나서 말할 것입니다. “여기 우리가 지켜야 할 소중한 한 사람 한 사람이 있다고.” 아니 여러분이 설령 다른 목소리를 내지 않는다 해도, 민주와 자유의 가치를 진정 소중히 하는 사람들은 여러분을 위해 말할 것입니다. “여기 우리가 지켜야 할 소중한 한 사람 한 사람이 있다고.” 그 이유는 우리 스스로가 똑같은 견해를 가진 사람들이 아니라 서로 다른 견해와 목소리를 가지고 있음을 여전히 믿기 때문이며, 그 다름의 가능성이야말로 우리가 정치적 존재임을 증명한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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