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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냐면] 진보 시즌2에 바라는 것 |
전영진 영남대 정치외교학과 4학년
진보 성향을 지닌 대구지역 시민단체 연대모임에 참석했을 때 일이다. 그곳 사람들은 행사를 진행하는 데 앞서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불렀다. 보통 공식행사 때 애국가를 불렀던 나로서는 그곳 분위기가 낯설 수밖에 없었다. 행사 관계자에게 그 이유를 물었다. 답변은 간단명료했다. 국가주의를 거부하기 때문이란다. 애국가가 박정희 시절 국민들에게 맹목적인 국가 충성을 강요하기 위한 통치수단이었단다.
노래를 부를 때 불끈 쥔 주먹을 아래위로 흔들면서 마치 노동자의 투쟁을 연상하게 하는 그 모습은 낯섦을 넘어 구식으로 느껴졌다. 시대에 따라 역동적인 변화를 추구해야 할 진보가 세련되지 못하고 낡은 것으로 느껴지다니 마음이 착잡했다. 하지만 민주주의는 다양성을 인정하는 사회이기 때문에 그런 그들의 생각조차 존중해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심각한 것은 다른 데 있었다. 그들은 국가가 국민의 생활 속에 침투해 애국가를 부르는 걸 당연시하게 만드는 내재적인 권력이야말로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는 국가주의 폭력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그들은 단체의 공식행사 때, 다른 한편으로 애국가를 부르고자 하는 사람들의 견해를 존중하지 않았다. 그곳 관계자는 마치 내가 국가주의에 경도된 사람인 것처럼 비판을 서슴지 않았다. 그러고는 나를 계몽시키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게 아닌가. 그곳에는 애국가에 대한 다양한 견해차를 존중해주는 담론 자체가 형성돼 있지 않았다. 그들이 강조하는 ‘우리 모두 하나 됨’의 이면에는 자기와 다른 견해를 존중하지 않는 폭력이 고개를 쳐들고 있었다.
이번 통합진보당 사태에 따른 진보의 위기가 단순히 당권파의 계파이익 때문에 발생했다고 보지 않는다. 당권파의 부정은 진보의 위기를 발화시킨 표면적인 사건에 불과하다. 중요한 건 진보진영 내에 스며든 집단 우월적 사고 자체다. 자신들의 생각이 옳은 나머지 내부 성찰을 게을리하고 다른 입장에 선 사람을 배제 또는 계몽시키려는 사고 말이다. 이러한 비판에서 자유로운 진보가 과연 몇이나 되겠는가. 이런 인식의 기초에는 진보가 여전히 정치를 국가권력에 대항해 집단의 신념을 적과 나의 싸움으로 관철시키려는 태도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한다. 문제는 정치를 상생과 협력이 아닌, 선과 악의 이분법으로 정의할 때 집단사고의 논리에 빠질 위험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집단사고에서 기인한 정치는 국민들로 하여금 괴리감을 느끼게 만든다. 우리 사회의 진보정당이 대중정당으로 거듭나지 못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국민들은 이번 통합진보당 사태나 애국가를 둘러싼 당내 갈등에 대해 심각한 괴리감을 느끼고 있다. 애국가 같은 경우 역시 부르고 안 부르고의 이분법적 사고에서 벗어나야 한다. 사실 우리나라에 축구장, 야구장 등 사회 각종 행사에서 애국가를 부르는 것을 두고 누구든 문제를 제기할 수 있다. 그렇다면 누구의 의견이 옳고 그른지를 떠나 사람들의 다양한 견해를 충분히 담을 만한 사회적 담론을 형성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그로 인해 서로의 견해가 봇물 터지듯 쏟아져 나오고 치열한 토론이 벌어질 때 그 속에서 하나의 국민적 공감대가 형성되는 것이다.
최근 진보정당의 위기에 따른 진보 시즌2 움직임이 보이고 있다. 시민들이 대거 입당해 낡은 진보를 바꿔보자는 취지에서 비롯됐다. 진보정당을 운영하는 부분에 문제가 있었지만 진보 가치 전체가 잘못된 것은 아니라는 공감대가 시민들 사이에 형성된 것이다. 그래서 더욱 기대를 걸어본다. 새롭게 시작될 진보 시즌2는 과거의 낡은 사고에서 벗어나 국민의 눈높이와 함께할 수 있는 세련된 진보로 거듭났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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