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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2.06.06 19:34 수정 : 2012.06.06 19:34

일러스트레이션 김선웅

샌델 교수의 쌍용차 분향소 방문
‘민주적 시민정신’ 실천에 대해
고민해 볼 수 있는 계기 됐으면

지난 일요일 마이클 샌델 하버드대 교수가 쌍용자동차 희생자 합동분향소를 찾았다는 기사를 보고 두달 전 기억이 떠올랐다. 때는 <나는 꼼수다>가 피자와 짜장면을 서울시청 앞 서울광장에서 쏘기로 했던 총선이 얼마 남지 않은 일요일. 나는 아내와 네살배기 아들 그리고 친구들과 함께 순전히 피자를 얻어먹을 요량으로 서울광장으로 향했다가 건너편 대한문 앞의 쌍용자동차 희생자 합동분향소를 보았다.

무리들과 함께 분향소 앞 횡단보도를 지나 서울광장에 도착했지만, 나는 마음이 불편해서 쌍용차노조 분향소를 몇 번이고 되돌아봤다. 서울광장에서는 수백명이 모여 정치 스트레스 해소를 위해 여러 가지 행사를 하는 동안 분향소는 내내 한산했다. 상주를 비롯한 몇명이 자리를 지키고 있는 모습이, 수백명의 함성이 뒤섞인 길 건너편 서울광장의 풍경과는 사뭇 대조돼 마음이 내내 편치 않았다. 뭔가 같은 방향성을 가지고 있는 것 같은데 그 간극이 너무나도 커 보이는 느낌이랄까.

나는 불편함을 이기지 못하고 아들과 함께 무리를 빠져나와 분향소로 갔다. 조금이라도 그 자리에 함께 있어야겠다는 생각에 네살배기 아들에게 전후사정을 설명해주고 직접 조의금을 내도록 했다. 그 외에는 별로 할 수 있는 게 없어 얼마 있다가 다시 길을 건너왔다.

공교롭게도 이즈음에는 한겨레 훅이나 다른 블로그 등에서 나꼼수의 한계에 대한 비판글이 종종 올라오던 때였다. 사실 나는 나꼼수 비판글들에 대해 공감은 하지만 나꼼수에 비난의 화살을 던지는 사람은 아니다. 어차피 한두명이 슈퍼맨처럼 현실의 모든 문제들을 해결할 수는 없는 것 아닌가. 나꼼수는 처음부터 자신들의 목적과 역할을 명확하게 했고, 그 역할을 수행하는 데 있어 박수를 보내고 싶을 정도로 용기있게 실행하고 있는 이들이라는 것이 내 생각이다. 나꼼수가 없었다면 분향소뿐 아니라 시청광장도 한산했을 테니까.

그러나 나꼼수의 한계는 분명히 존재하며, 그 한계를 넘어서는 일은 나꼼수가 아니라 나꼼수를 통해 정치에 관심을 가지게 된 많은 이들의 몫이다. 정치가 대중에게 스트레스를 주는 중요한 원인인 것은 분명하나, 정치 참여는 그 스트레스 해소를 목적으로만 할 수 없다. 이 점을 인식하고 더 깊은 화두를 던져보지 않는 한 나꼼수의 한계는 더욱 명확해질 수밖에 없다고 본다.

그날 나는 한명의 시민으로서 시청 앞과 대한문 앞의 간극의 해소를 위해 그리고 스트레스 해소를 넘어선 정치 참여를 위해 고민해야 할 부분이 바로 ‘공감’과 ‘연대’가 아닌가 하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 화두를 분향소를 향했던 정치철학의 대가, 공동체주의 정의론의 권위자인 마이클 샌델 교수의 발걸음에서 다시 떠올리게 됐다.

샌델 교수의 분향소 방문으로 좀더 많은 이들이 쌍용차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되고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됐으면 좋겠다. 하지만 단지 유명한 교수가 찾았다고 해서 쌍용차 문제가 사람들의 관심의 대상이 된다면 여전히 아쉬운 일이다. 아직 갈 길 먼 한진중공업 노사 문제, 문화방송(MBC) 문제, 청소노동자 분들의 열악한 처우 문제 등 사회 속에 이런 갈등들은 수없이 많다. 개인적으로는 샌델 교수의 한국에서의 강연 그리고 분향소 방문과 같은 의미 있는 행동이 단지 좋은 강연이나 기삿거리에 그치지 않고, 한명의 시민으로서 그가 말한 ‘민주적 시민정신’의 실천에 대해 고민해 볼 수 있는 계기가 됐으면 한다.

안정권 경기도 용인시 기흥구 영덕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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