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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2.06.18 19:32 수정 : 2012.06.18 19:32

백태웅 미국 하와이대 로스쿨 교수

아마 1992년 5월8일 혹은 9일 밤이었을 것이다. 남산 지하실에 거대한 덩치의 수사보조원 두 사람과 함께 그 사람이 내려왔다. 50대 후반, 넓적한 얼굴, 방금 목욕을 하고 왔는지 그에게서 비누냄새가 났다. 그는 박정희 긴급조치 때부터 중앙정보부에서 일해 왔다고 했다. 국가안전기획부(안기부) 지하실 독방 취조실에서 그가 나의 귀에 입을 가까이 대고 말했다.

“너희들, 혁명을 하려고 한 거지? 혁명 나면 우리 같은 사람 다 죽이려 하겠지? 그때는 우리가 죽어 주마. 그렇지만 지금은 우리 세상이니, 우리가 하자는 대로 해야지. 묵비권이 다 무슨 소용이냐. 5분만 ‘태우면’(물고문 또는 전기고문을 의미) 다 불게 돼 있어!”

나는 마음을 다잡고 말했다. “우리의 활동이 국가보안법 위반이고 반국가단체라면 나에게 사형을 구형하고 또 실형을 선고해라. 그렇지만 헌법과, 형법과 형사소송법에 따라 처벌하라. 우리 법과 규칙 어디에도 고문해도 좋다는 조항은 없다. 왜 가혹행위를 하냐. 왜 취조받는 사람에게 반말을 하고 욕설을 쓰냐. 존댓말을 써라.”

그의 반응은 고함과 분노의 손찌검으로 돌아왔다. 살 떨리는 고문과 핍박이 이어졌다. 나는 민주주의와 노동자와 민중을 위한 활동으로 처벌받을 용의가 있었다. 그러나 그들이야말로 독재를 정당화하고 폭력의 사슬을 휘두르며 법의 존재를 부정하고 있었다.

6년여 독방 감옥살이를 마친 뒤인 1999년 어느 날엔가 국가보안법 관련 수사를 총지휘하신 분을 여의도에서 만났다. 그분은 식당 방문 입구 쪽에 있는 옷걸이에 자신의 양복 상의를 걸지 않는다고 했다. 그는 당시 정부로부터 밀착 감시를 당하고 있다고 했고, 누군가가 자신의 호주머니에서 일정 등이 적힌 지갑을 빼갈까 걱정이 돼서라고 했다. 과거 고문을 포함한 불법 체제를 총지휘하던 그가 아이러니하게도 불법적 감시를 당한다고 말하고 있었다.

민주주의는 명백히 처벌받아야 할 위법이 없을 때에는, 부당한 사찰과 감시와 사상 공세를 받지 않아도 되는 체제이다. 영장 없이 체포되고 조사받는 것을 겁내지 않는 것이 진정한 민주주의다. 그런 의미에서 어쩌면 과거의 그 수사관들도 불행한 시대의 희생자인지도 모른다.

최근 통합진보당의 비례대표 선거 과정과 그 이후에 보인 일부 인사들의 비민주적인 행태로 신문에서는 연일 종북 세력에 대한 성토와 사상검증 공세가 이어지고 있다. 진보와 민주주의의 뜻에 어긋나는 그들의 행동은 국민들의 지탄을 받고 있다. 또한 북한을 둘러싼 정치적 논란에 대해 상식과 동떨어진 대응을 하는 그들의 태도는 국민의 공감을 받기 어렵다. 나는 그들이 시급히 국민의 사랑을 받는 길을 자각하고 빠른 행동을 취하기를 바라고 있다.

하지만 이를 빌미로 과거에 학생과 민주인사들을 고문하고 협박하고, 불법적으로 성폭력했던 그 당사자들이, 그러한 폭력으로 제조해낸 국가보안법 위반자들을 종북 세력이라고 부르고 이들의 국가관을 문제 삼는 것은 도무지 용인하기가 어렵다. 일부 세력을 싸잡아 적으로 매도하고, 검증해서 박멸하자고 나서는 것은 개개인의 생각을 차별하는 천부적 인권의 침해이자, 대한민국 헌법이 보장하는 기본권에 어긋나는 행위다.

이 틈을 타 놀랍게도 쿠데타를 통해 집권하고 민주주의와 자유를 유린한 전직 국가원수 전두환씨가 육군사관학교를 방문해 앞으로 젊은 장교가 될 생도들의 사열을 받았다. 청산되어야 할 군사독재를 정당화하기 위한 첫 시도일까. 정녕 권위주의의 향수에 기반을 두고 냉전적 이념으로의 회귀를 꿈꾸는 세력이 있다면, 그들이야말로 헌법과 법률에 어긋나는 범법 행위를 하고 있는 것이므로 준엄한 경고를 보내지 않을 수 없다. 고문과 폭압통치의 과거를 미화하고 시대착오적인 냉전적 선동을 하기보다는, 지난 세월 꿋꿋이 살아내고 앞으로도 이 나라의 미래를 열어갈 참된 주인을 위해 어떻게 더욱 봉사할 것인지를 논하는 모습을 보여 주기를 진심으로 권고하고 싶다. 우리는 안타까웠던 지난 과거를 넘어서 참된 민주주의와 평화가 꽃피는 미래를 향해 나아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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