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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2.08.29 19:19 수정 : 2012.08.29 19:19

신영전 한양대 교수·사회의학

조형. 저는 지금 바르셀로나의 몬주익 언덕에 서 있습니다. 1992년 이곳에서 열린 여름올림픽 때 황영조 선수가 일본의 신예 모리시타 고이치 선수를 제치고 선두로 나서 마침내 마라톤에서 우승했던 바로 그 언덕입니다. 마침 런던올림픽도 얼마 전에 끝났고, 한-일 간 독도, 위안부 문제 등으로 시끄러운 요즘, 이 언덕에 서서 그때를 회상하는 것은 특별한 감상을 자아냅니다.

하지만 지금 제가 서 있는 언덕은 그 반대편 산등성이에 있는 채석장 묘지(Fossar de la Pedrera)입니다. 이곳에는 나치 정보원들에게 체포되어 죽음을 당한 카탈루냐의 마지막 대통령 유이스 콤파니스가 다른 희생자들과 함께 묻혀 있습니다. 황영조 선수가 월계관을 쓴 그 몬주익 경기장의 본래 이름인 ‘에스타디 올림픽 유이스 콤파니스’는 바로 이 사람을 기리기 위한 것입니다.

히틀러와 무솔리니가 지원하는 프랑코 독재와 싸우기 위해 미국·영국을 포함한 세계 53개국에서 3만명 이상의 진보세력이 모여들었던 에스파냐(스페인) 내전은 반드시 이겨야 했던 싸움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졌습니다. 내전에 참여했던 앙드레 말로는 이 전쟁에서 “정의가 패배할 수 있음을, 폭력이 정신을 꺾을 수 있음을, 용기가 보답받지 못할 수 있음을 배웠다”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패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파시스트들은 일사불란했고, 진보진영은 헌신적이었으나 충분히 유능하지 못했습니다. 또한 큰 차이보다 오히려 서로 간의 작은 차이에 집착했습니다. 그들의 패배는 유이스 콤파니스의 운명이 보여주듯 참담한 것이었고 30년의 프랑코 독재로 이어졌습니다. 내전 뒤에도 반대세력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 및 보복이 이루어져 적어도 3만명 이상이 처형당했습니다.

조형, 대통령선거가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한 대선 주자의 아버지는 한국의 프랑코였고, 그 후보와 추종세력은 그 역사를 재현하려고 하고 있으며, 또 많은 이들이 그들의 승리를 점치고 있습니다. “역사에서 교훈을 얻지 못한 사람은 그 역사를 반복하게 된다”는, 아우슈비츠(오시비엥침) 수용소 참관을 시작하는 곳에 붙어 있던 조지 산타야나의 글귀처럼, 우리가 지나간 역사에서 배우지 못한다면 얼마 뒤 카탈루냐의 비극이 다시 우리 땅에서 재현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지 않으려면 한국의 진보는 더 ‘유능’해져야 하고, 소탐대실하지 않는 ‘통 큰 연대’가 필요합니다.

유이스 콤파니스의 묘지 근처에는 에스파냐 내전의 많은 전사들이 함께 묻혀 있고 그중에는 아나키스트의 상징인 두루티(1896~1936)와 그의 친구 파레와 아스카소의 무덤도 있습니다. 두루티의 삶을 소설화한 <어느 무정부주의자의 죽음>(실천문학사)에 따르면, 패전 이후 그의 친구들과 후손들은 전세계 곳곳에서 망명생활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망명생활 중에도 결코 우울증에 빠져 있거나, 국가가 주는 생활보조금을 타서 쓴 일도 없으며, 오히려 남을 돕기를 좋아하고 그들 자신의 행동이 옳았다는 신념에 대해서는 한 치도 양보하지 않는 전사로 청렴하고 행복하게 살아가고 있다”고 적고 있습니다. 더욱이 지금 에스파냐는 기존의 수탈적 자본주의를 대신하여 서로 상생하는 새로운 사회모형을 만들어 가려는 몬드라곤으로 대변되는 전세계 협동조합운동의 근거지가 되고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어쩌면 에스파냐 내전을 ‘파시스트의 승리’라고 부르는 것은, 오히려 ‘복지국가’를 포함하여 ‘국가의 과잉’ 속에서 살고자 하는 우리의 잘못된 역사관 때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한여름 무더위 속에서도 카탈루냐 광장은 활기와 자신감이 넘치고, 지난 24일 밤 거대 자본을 상징하는 레알 마드리드와 협동조합 형태로 운영되는 FC바르셀로나 사이에 벌어진 맞수의 축구대결, ‘엘 클라시코’는 작은 키의 리오넬 메시가 이끄는 바르셀로나의 압승으로 끝났습니다. 바르셀로나 거리가 환호로 뒤덮여 있을 때, 저는 문득 두루티의 무덤 위에 누군가 써 놓고 간 편지의 문구가 떠올랐습니다. “Otro mundo es posible.”(다른 세계는 가능하다.) 곧 서울에서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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