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요메뉴 바로가기

본문

광고

광고

기사본문

등록 : 2012.09.05 19:21 수정 : 2012.09.05 19:21

9월4일치 오피니언면 ‘세상읽기-성숙한 사랑’을 읽고

한고은 서울시 마포구 공덕동

혜민은 동료 교수의 사례를 인용해 남녀가 성숙한 사랑으로 가기 위한 단계에서 마주하는 어려움과 그 원인, 도움이 될 만한 충고를 얹어 칼럼을 완성했다. 제목 그대로 ‘성숙한 사랑’을 위한 지침서 정도 되겠다. 그러나 이 글은 성숙한 사랑을 논할 자격이 없다. 혜민은 남편의 외도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동료 교수의 경우를 들며 글을 시작한다. 글에 가까운 사례를 드는 것은 그 자체로 전혀 문제없다. 문제는 사연의 주인공인 동료 교수의 실명을 밝혔다는 것이다. 남편의 불륜 사실, 동료 교수의 정신적·정서적 불안감이 그대로 노출됐다. 그것도 그녀의 인생과 크게 상관없을 먼 나라 한국의 독자들에게 말이다. 미국 햄프셔대학의 ○○라는 교수는 최근 남편의 외도 사실을 알고 감당하기 힘든 정신적 어려움을 겪고 있다, 이것이 내가 이 칼럼을 통해 얻었어야 할 감상 중 하나일까? 그는 혜민에게 그러한 사생활을 털어놓으며 전혀 관계없는 누군가가 자신의 사정을 알 수도 있을 거라고 생각했을까? 성숙한 사랑이라는 혜민의 결언에 다가가기도 전에 발견한 성숙한 배려의 부재는 글 읽기를 포기하게 만들었다.

너무 심각하게 보는 것 아니냐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같은 날 <한겨레> 11면을 보라. 흉악범죄의 용의자나 피해자의 이름과 같다는 이유만으로 생활상 불편함을 겪는 평범한 시민들의 사례가 보도됐다. 전혀 다른 맥락에서 자신의 이름이 공중에 노출돼 겪는 피해는 결코 유쾌한 일은 아니다. 사건과 무관해도 언급되는 것만으로 큰 스트레스를 유발한다. 특별한 경계심 없이 털어놓은 사생활의 비자발적 탄로 역시 불쾌하다. 더구나 글쓴이는 ‘얼굴에 그늘’, ‘어깨에 큰 짐’, ‘이상하리만큼 조용’, ‘떨리는 목소리’, ‘너무도 큰 충격’ 등등의 말들로 동료 교수를 묘사했다. 그가 당한 일이 좋지 않은 일이라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특정 다수에게 그의 실명을 밝히고, 직장을 유추할 수 있도록 한 이유는 무엇인가? 아무리 좋은 이야기를 꺼내기 위해 예로 들었다 하더라도 이건 당사자에게 안 될 일이다. 사실 이 글은 ‘한 동료 교수’ 또는 ‘○○(가명)’이라고만 했어도 충분히 배려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더욱 안타깝다. 성숙한 사랑에 앞서 성숙한 배려를 볼 수 있었으면 한다.

광고

브랜드 링크

멀티미디어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한겨레 소개 및 약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