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요메뉴 바로가기

본문

광고

광고

기사본문

등록 : 2012.09.26 19:32 수정 : 2012.09.26 19:32

20일치 왜냐면 ‘세계시민으로서 사형제 바라보기’를 읽고

고종한 경기 고양시 덕양구

형사처분은 인권에 대한 중대한 제한이므로 그 경중은 정의와 관련된 중요한 문제다. 그런데 우리 형법을 포함해 모든 나라에서 절도보다 살인을 중하게 처벌한다. 우리의 경우 절도는 6년 이하의 징역에 처해지는 반면, 살인은 5년 이상부터 사형까지 가능하다. 이처럼 살인을 절도보다 중하게 처벌하는 이유가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우리는 뭐라고 답변할 수 있을까?

어떤 사람들은 형벌의 목적이 교화에 있는 반면 보복은 목적이 아닌 것처럼 말하기도 하는데, 그렇다면 이러한 형량의 차이는 과학적으로 계산된 교화의 난이도에 따라 결정된 것인가? 내가 과문한 탓인지는 몰라도 그런 것 같지는 않다. 그보다는 각각의 범죄행위에 대해 우리가 느끼는 분노의 정도, 즉 정의 관념에 따라 결정되었을 것이라는 설명이 좀더 설득력 있다. 모든 사람에게 재산도 중요하긴 하지만 그 소중함이 생명에 비할 바는 아니고, 따라서 우리는 재산의 침해보다 생명의 침해에 대해 더 큰 분노를 느끼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를 통해 우리는, 왜 그러한 처벌이 옳은가라고 묻는다면, 그 정당성의 근거는 결국 우리 자신이 느끼는 ‘감정’ 이외의 다른 무엇이 아니라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된다.

사형제 폐지론자들은 사형제가 갖는 의미, 예컨대 그것이 한없이 존귀한 생명권에 대한 본질적 침해이며 인명을 수단으로 다루는 것이라는 등의 설명을 함으로써 사형제의 부당성을 증명하려고 한다. 하지만 앞서 언급했듯이 무엇이 왜 옳은가라는 문제에 대한 답은 궁극적으로는 단지 우리 자신의, 본질적으로 주관적일 수밖에 없는 가치판단과 감정에 의존할 뿐이며, 그것이 다행히 보편성을 획득할 수 있을 때 정의로 받아들여지는 것이다.

‘생명이 재산보다 더 소중하다는 가치판단이 옳고 그 역은 왜 옳지 않은가’라는 질문에 대해 우리는 궁극적으로는 우리 자신이 그렇게 느낀다는 것 이외에 어떤 설명도 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다수의 인명을 잔혹하게 살해한 자에 대해, 폐지론자들의 주장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다수의 사람들이 사형이라는 형벌이 죄에 상응하는 정당한 형벌이라고 생각한다면, 사람들의 그런 생각이 옳지 않다고 주장할 근거는 어디에도 없는 것이다.

사실 사형제 폐지론은 인간의 심리와 사회제도상의 이유로, 어느 정도는 어쩔 수 없는 불공평한 이점을 누리고 있다. 범행은 그것이 아무리 잔혹해도, 결국 우리가 직접 보거나 경험한 것이 아닌 남의 일일 뿐이며, 사형을 집행한다고 죽은 사람이 살아 돌아올 것도 아닌, 이미 발생한 어쩔 수 없는 과거의 일이다. 반면 사형 집행 여부는 우리 앞에 놓인 난제다. 이런 이유로 시간이 지나면 들끓던 분노는 가라앉고 상대적으로 사형 집행의 잔인함만 부각되기 쉽다.

하지만 이런 커다란 불균형에도 불구하고 사형제에 대한 지지 여론은 문화권과 상관없이 대체로 과반을 유지한다고 한다. 그리고 앞서 지적했듯이 이러한 다수의 판단이 정의롭지 못하다고 주장할 근거는 없다. 한때의 여론이 아닌 오랜 세월에 걸친 토론을 통해서도 변하지 않는 일관성 있는 입장이라면, 이런 다수의 판단을 따르는 것도 충분히 정당하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광고

브랜드 링크

멀티미디어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한겨레 소개 및 약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