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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냐면] 그래도 살아남자 / 이이화 |
꿈이 좌절된 뒤를 생각한다. 사람에 따라서, 그 사람의 처지나 꿈의 간절한 정도에 따라 좌절을 감당하는 모양새는 다양하다. ‘집단 상실감’, ‘극도의 외상 후 스트레스 증후군’, ‘심리적 트라우마’ 등의 단어들을 지난 12월19일 이후 접한다. 그래도 이는 살아남은 자들의 일인데, “어떻게 5년을 더…” 하며 그 무게를 껴안고 목숨을 끊는 이들도 있으니, 희망과 좌절, 그 이후를 어찌해야 할까?
“유신의 부활”이라 외쳤으나 군사독재의 시대는 아니며, 아니 그보다 교묘한 퇴행정권을 예감한다 하더라도, 함께한 사회적 합의가 빚은 결과이니 규칙에 ‘승복’하는 것이 기본자세다. 인정받기 위해서라도 인정하는 것이 순리이며, 지금 승복하지 않으면서 언젠가 승복하라고 요구할 수 없는 일이다. 일각에서 제기하는 18대 대선 과정의 몇 가지 의혹도 결국 명쾌하게 승복하고자 하는 안간힘 아닌가. 전장에서도 적장에게는 예를 갖추었으니, 힘이 아니라 이성에 따른 승복은 인간만의 매력이다.
그런 다음 그 절망을 낳은 패배는 실상 ‘내’ 안에서 발원한다는 뼈저린 반추가 필수다. 패배는 그럴 만한 내가 있어 찾아온 것이다. 나의 희망이 간절하여 남의 절망을 담보로 하진 않았는가? 이편의 극단적 기치로 저편의 극한적 박탈감을 겨냥하진 않았는가? 고향으로 돌아가 농사짓겠다는 전임 대통령을 죽음으로 내몬 패악의 정권에 맞서 “민란을 일으키자!” 했다. 그 말이 그른가? 소통불능의 횡행에 맞서 “2012년을 정복하자!”했다. 그 아닌 다른 길이 있었던가? 대선 토론에 나선 한 후보가 또 한 후보를 향해 “떨어뜨리려 나왔다. 반드시 떨어뜨리겠다” 하는 말에 잠시 환호했다. 역사를 거스르려는 모주에 대해 그 외 다른 대응이 유효하던가?
그러나 결국 ‘민란’은 실패하여 조선말 동학군의 말로처럼 되었고, 정복하고자 목청을 높였으나 ‘피정복’의 기간을 연장했으며, 반드시 떨어뜨리겠다던 목청은 떨어지지 않겠다는 다급함에 기민한 촉매가 되었다. 곡을 바루려는 열망이 간절해 나 자신 다른 쪽의 곡이 되어 있음을 미처 알아채지 못했다.
그럼에도 절망을 수습하려는 모습이 다시 절망을 안긴다. 기다렸다는 듯이 패자의 상처를 덧내며 내 몫을 챙기려는 한솥밥 그런 무리에게서 어떤 희망의 싹수를 발견할까? 본선 기간 동안 존재감 없던 이들의 돌출은 정치 이전에 ‘인간에 대한 예의’에 결격이다. 위로의 악수를 간단히 건너뛴 질타는 다음을 기약하지 못하게 할 것이다. 다시 희망을 피워 올리는 것은 따뜻하되 냉철한 자기세정에서 비롯된다.
진보니 진리니 하는 교만은 이미 화를 불렀다. 대중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는 진보라면 용도폐기의 시한을 넘겼다. “경제를 살리겠다”는 발림수는 아니되, 대중의 상처를 감당하며 합당한 치유로 그들을 끌어오는 외유내강이 긴요하다. 한때 노무현을 통해 희망을 꿈꾸었으나 그를 통해 한계를 보았다. 그 시선 너머로 나아가지 않는 한 진보의 미래는 요원하다.
올겨울은 삼한사온의 미덕도 종적을 감췄으니 한번 쌓인 눈은 쉽게 사라질 요량이 아니다. 마음이 시리니 계절까지 시리다. 늦은 밤 주막을 찾아 찌그러진 주전자를 두드려댄들 멀리 있는 봄 햇살이 냅다 달려오랴? 춘풍이 칼바람을 내몬다는 진리를 잠시 잊었다. 결국 그 절망도 희망도 나와 너를 가르는 대신 엉켜 살아가는 우리 속에서 융해될 것이다. 이 얼음장 아래서도 다시 봄은 오리니, 그래도 살아남아야 그 햇살을 볼 것이다.
이이화 인문학을 생각하는 텃밭농사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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