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5.08.15 19:11
수정 : 2005.08.15 19:12
|
정병호 4월혁명회 공동의장
|
기고
올 여름 무더위를 더욱 무덥게 해주는 것은 옛 안기부의 불법도청 테이프(엑스파일) 사건이다. 그런데 그 엑스파일 중 일부가 언론계에 입수돼 삼성이 자본권력으로 국가기구를 흔들었다는 사실이 세상에 알려졌다. 그 내용은 이학수 당시 삼성 비서실장이 언론계의 홍석현 중앙일보 사장을 통해 1997년 대통령 선거 때 주요 대통령 후보자들에게 많은 돈을 쏟아 부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검찰에도 돈을 주었다는 것이다.
이 사건은 특히 재벌이란 자본권력이 국가기구를 지배하려 했다는 사실이 국가정보기관인 안기부의 도청을 통해 세상에 알려지게 됐다는 점에서 눈길을 끌었다.
필자는 이 사건을 이해하는 방법 중의 하나로 니코스 풀란차스(1936~1979)를 서재에서 만나보기로 했다. 풀란차스는 국가기구를 억압적 국가기구와 이데올로기적 국가기구로 나눈다. 억압적 국가기구에는 검찰·경찰·정보부·군대·형무소 등이 있다. 이 국가기구는 지배권력에 순종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질서를 지키도록 주먹 등 물리적 생체권력이란 억압수단을 동원한다는 특성을 지니고 있다. 이에 반해 이데올로기적 국가기구에는 언론사·대학·종교단체·정당·조합·가정 등이 거론된다. 이 국가기구에서는 지배이데올로기를 만들어 이를 널리 보급하고 백성들의 동의를 얻도록 하는 기능을 담당하며, 여기에는 지식권력이 주로 동원된다. 그런데 이 두 국가기구는 경제부문에 대해 상대적 자율성을 가지면서 기존 사회관계의 재생산 구실을 맡기도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풀란차스의 눈으로 삼성사건을 살펴보자. 삼성은 자본권력을 가지고 억압적 국가기구의 상징인 검찰에 돈을 뿌렸고, 이데올로기적 국가기구의 핵심인 언론사 대표를 동원해 정치자금을 뿌렸다. 그리고 이 두 국가기구의 정상이 될 대통령 후보군에게 돈을 뿌렸다고 한다. 이 외에도 삼성은 상시적으로 정부 고급관료 출신을 삼성 경영진으로 충원함으로써 정경유착을 통해 정부 간섭과 감독으로부터도 벗어나고자 하였음도 엿볼 수 있다.
우리는 여기서 삼성이 자본주의 국가론을 세상에 어떻게 읽어주었는가를 보게 된다. 삼성은 국가기구들의 상대적 자율성마저 인정하지 않으면서 자본권력으로 국가기구들을 지배하려 하였고, 국가기능의 축소와 퇴각을 꾀한 것이다.
한가지 더 짚을 것은 문화방송의 이상호 기자가 문제의 엑스파일을 입수하여 삼성의 정경유착 죄업과 원형감옥의 감시체계를 관리해 온 옛 안기부의 촉수를 폭로했다는 점이다. 이 기자는 푸코의 말대로 잘못되고 있는 역사적 현실을 폭파하는 ‘연장통’을 들고 나선 것이다. 이 기자의 엑스파일 보도문제에 대해서는 관계법령을 둘러싸고 시비공방이 되고 있으나 보도사실 외에 다른 흑막이 없다면 설사 실정법상 유죄가 인정된다 하더라도 제3심의 법률심을 넘어선 제4심인 역사심에서는 무죄 또는 영예가 안겨질 것이다.
이제 삼성이 읽어 내린 자본주의 국가론의 오류를 바로잡는 연장통을 우리 모두 짊어지고 나설 때가 되었다고 본다. 참여연대가 삼성사건 관련 인사를 고발하는 것이 하나의 신호다. 자본권력에 의한 국가기구 장악, 특히 자본권력이 국가기구의 상대적 자율성과 고유성까지 훼손하려고 하는 태도는 용납할 수 없는 죄악이라고 생각한다.
정병호 /4월혁명회 공동의장
광고
기사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