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3.02.27 19:55
수정 : 2013.02.27 19:55
80.14%. 지난 대선 때 내가 사는 대구에서 박근혜 대통령이 얻은 득표율이다. 제1야당을 지지한 ‘깨어 있는 시민’들은 기득권의 손을 들어준 대구시민을 노예근성에 젖은 사람들이라고 비난했다. 어쩔 수 없는 보수의 도시라는 조롱도 있었다. 그러나 사실, 내가 만나본 경험으로는 박근혜 후보를 지지한 대구 청년들과 진보를 말하는 이들의 생각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양쪽 모두 정의와 상식이 통하는 세상을 말했고, 공정한 사회로의 변화를 원했다. 말하자면 그들 모두 ‘착한’ 사회를 진정으로 갈망하고 있었다. 이들이 공통으로 희망하는 것은 도덕적인 사회였다. 박 대통령의 유일한 대항마로 떠올랐던 안철수의 대중적 인기는 이 점을 정확히 보여준다. ‘착한 후보’ 안철수를 지지했던 유권자들은 선량하고 도덕적인 지도자가 더 나은 세상을 만들어낼 것으로 기대했던 것이다.
나는 이들의 진정성을 의심하지 않지만, 이들이 바라는 도덕적 ‘힐링’은 믿지 않는다. 아니 내가 의심하는 것은 1 대 99로 양극화된 잔인한 시스템은 외면하면서 착한 세상을 바라는 도덕적 감수성이다.
지난 대통령 선거의 유력 후보 3명 중 그 누구도 탐욕과 생존경쟁을 조장하는 체제의 문제를 말하지 않았다. 이들은 정치에서 정의를, 경제에서 공정을 말했지만 근본적인 변화에는 침묵했다. 대신 그들은 자신들의 도덕성을 믿어달라며 착한 마음을 호소하기에 바빴다. 마치 그들이 대통령이 되면 그토록 바라던 민중의 새날이 올 것처럼. 그러나 우리는 도덕성이라면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았을 노무현 전 대통령이 만든 시대를 기억한다. 착한 지도자도 세상을 바꾸지 못하자 사람들은 “이게 다 노무현 때문이다”라는 유행어를 만들어냈다. 그리고 지금은 다시 “이게 다 이명박 때문이다”라는 말로 되풀이되고 있다.
도덕성으로 보자면 극과 극일 법한 두 대통령이지만, 보통사람들에겐 이들이 만들어 낸 세상에 별 차이가 없어 보인다. 등록금에 저당 잡힌 대학생들은 알바인생을 면치 못하고 있고, 소수의 안정적인 일자리를 얻지 못한 청년들은 비정규직의 불안한 삶으로 내몰리고 있다.
우리가 진정으로 되물어야 하는 것은 우리의 변하지 않는 현실인 ‘시장의 법칙’ 그 자체다. 막연히 ‘착한 정치’만을 바라면서 사회 구조의 문제를 바라보지 않는다면 아무리 준엄한 비판도 공허한 메아리일 뿐이다. 이를 외면한다면 아마 5년 뒤에도 우리는 또다시 “이게 다 박근혜 때문이다”를 외치고 있을 것이다.
박근혜 정부가 출범했다. 나는 여전히 착한 사회를 꿈꾸지만 새 정부의 인사청문회가 ‘도덕적 무덤’이 되는 것을 지켜보면서, 다음 5년 동안도 철 지난 ‘진보주의자’들은 결코 줄지 않으리라는 불길한 예감이 든다. 그때 다시 진보라는 간판으로 새로운 착한 정치인을 찾아 헤매거나, 도덕적이고 당위적인 비판을 반복한다면 ‘진보’는 이미 겪은 실패를 반복하게 될 것이다.
시인 박노해는 그해 겨울의 패배를 참된 ‘시작’이라고 노래했다. 이제 ‘진보’를 말하는 이들이 해야 할 일은 먹고살기 가혹한 이 땅을 냉정히 응시하면서, 발 딛고 서 있는 나 자신의 삶이 왜 이토록 불안한 것인지를 되묻는 것이다. 이것은 담쟁이가 “한 뼘이라도 꼭 여럿이 함께 손을 잡고” 절망의 벽을 올라가듯 서로 다른 진보를 말하는 자들의 손이 함께 마주 잡았을 때 가능하다. 이것이 ‘진보’의 유일한 희망이 아닐까?
김종현 대구대 사회학과 4학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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