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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3.02.27 19:56 수정 : 2013.02.27 19:56

일러스트레이션 김선웅

독립운동이 역사적 가치로 대접받지 못하는 시대에 3·1절 94주년을 맞는다. 입으로는 3·1운동을 염불처럼 외우면서도 실제로는 그 정신과 거리가 먼 세력이 이날을 부끄럽게 해왔다. 2천만 겨레, 3천리 강토, 4천년 역사를 한꺼번에 빼앗긴 국치 9년 만에 일어난 3·1운동은 사자성어로 줄이면 ‘자주독립’이다. 일제의 총칼 앞에 신분·성별·지역·종파·노유를 가리지 않고 온전히 하나가 되어 궐기한 3·1운동의 목표였다. 100주년을 6년 앞둔 오늘, 3·1정신은 온전한가를 묻게 된다.

선열들은 일본 침략주의 야만과 대결하면서 비폭력투쟁으로 일관했다. 엄청난 희생이 따르고 이 땅은 시산혈해를 이루었다. 3·1운동에서 흘린 피와 가치는 결코 헛되지 않았다. 독립운동 단체들은 대부분 민주공화제를 지향하며 세계사의 조류에 합류했다. “우리 민족은 도수(徒手)로 분기해서 붉은 피로써 독립을 구하여 세계혁명사에 있어 하나의 신기원을 이룩하였다”(박은식, ‘한국독립운동지혈사’)

3·1운동은 일제의 폭압으로 진압되고 말았지만, 우리 역사에 계량하기 어려울 가치를 남겼다. ①상해임시정부 수립의 계기 ②전세계에 한국의 자주독립국가 존재 명시 ③국외에서 독립군의 무장투쟁 본격화 ④국내 노동·농민·사회운동 계기 ⑤일제 무단통치 배제 ⑥세계 식민지·반식민지 약소민족의 분발 ⑦중국 5·4운동의 촉진제 역할 ⑧인도 국민회의파의 비폭력운동 고조 ⑨필리핀과 아랍 일부 국가의 독립운동 촉발 등으로 정리된다.

3·1운동은 민족이성의 결집으로 이루어지고 이후 새로운 항일투쟁의 기점이 됐다. 3·1운동 이전의 모든 의병·독립운동이 이곳으로 흘러들고, 이후의 독립전쟁은 이곳에서 발원한다는 평가가 따른다.

이런 연유로 3·1정신은 대한민국 헌법 전문의 첫자리를 차지하지만, 일본군 출신들의 헌정 유린과 친일세력의 지배세력화로 허울만 남은 지 오래다. 이들은 정치권력뿐만 아니라 사법·국회·언론·기업·대학 등에 똬리를 틀고 세습하며 영원한 지배집단이 되어 독립운동과 임시정부를 폄훼한다. 특히 이명박 정권은 역사 교과서를 바꾸고 독재자들을 미화하는 등 역사왜곡을 일삼았다. 일본 극우파의 광태를 빼닮았다. 그리고 스스로 ‘뼛속까지 친일파’라고 과시했다.

동북아 정세가 심상치 않다. ‘쇼와(昭和)의 요괴’로 불리는 기시 노부스케의 외손자 아베 신조의 재등장 자체가 일본의 불길한 징조다. 시마네현이 주최한 ‘다케시마의 날’ 행사에 중앙정부의 고위관리를 참석하게 하는 등 독도야욕의 집요함을 드러낸다. 2월 초에는 독도담당 부서를 총리 직속의 내각관방에 설치했다. 며칠 전 아베는 버락 오바마와 한 첫 미-일 정상회담에서 ‘강한 일본’을 자신하며 미-일 동맹 강화를 바랐다.

안타까운 것은 북한이다. 미사일 발사와 세 차례의 핵실험으로 일본 극우세력에 군사화의 빌미를 주고 남북관계를 어렵게 만들었다. 선열들은 이날 “위력의 시대가 거(去)하고 도의의 시대가 래(來)하도다”라고 선언했다. 3·1운동 94주년을 맞아 남북 7천만 겨레가 그날의 정신으로 돌아갔으면 한다. ‘자주독립’은커녕 분열과 동족을 적대하고 외세에 의존하는 반3·1정신을 함께 참회하면서, 정의·인도·자유·평등의 가치를 구현하는 3·1절이 되기를 기원한다.

김삼웅 전 독립기념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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