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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냐면] 신뢰받는 매뉴얼 / 김철훈 |
성숙하고 선진화된 국가의 기본에는 늘 ‘준비된 매뉴얼’이 있다. 국가적 혹은 사회·경제적 위기는 어느 나라든 상시 존재한다. 다만 이 같은 위기에서도 그 사회의 구성원인 국민이 정부의 매뉴얼을 신뢰하고 따르는 사회라면 곧 정의로운 사회이며 건강한 사회일 것이다.
그런 점에서 미국은 다양한 ‘매뉴얼’과 더불어 이를 신뢰하고 묵묵히 따르는 국민의 정서가 보편화돼 있다. 쏟아져 나오는 매뉴얼보다는 이를 신뢰하고 따르는 국민의 ‘기본적 믿음’이 우선이다. 금융부실화에 따라 지난 3년간 미국 경제는 최악의 상황으로 곤두박질쳤다. 부동산 경기 침체로 집값은 반토막이 났다. 또한 악화일로의 국민경제는 수백만호의 주택소유주들을 벼랑 끝으로 내몰면서 모기지 장기체납이라는 걷잡을 수 없는 사태로 번졌다.
미국 정부가 이전에 경험하지 못한 이러한 금융위기는 3년여가 지난 지금 과연 어디로 흘러가고 있나. 매뉴얼의 보이지 않는 저력은 이 대목에서 힘을 발휘했다. 정부가 2년여에 걸쳐 금융권의 새판 짜기, 국민의 고통을 최소화하기 위한 ‘매뉴얼’ 공개를 하는 사이, 은행들은 금융위기에 따른 국민의 고통을 옥죄지 않았다. 1년 이상 모기지 장기체납자에게도 은행들은 정부와 머리를 맞대고 만든 ‘매뉴얼’에 따라 차근차근 풀어나갔다. 미 역사상 최저금리인 3% 미만의 저리로 주택소유자들의 숨통을 터줬다. 또한 일정한 유예기간을 두고 체납이자를 미뤄주는 등 ‘깡통주택’ 소유주들이 살 수 있는 방법을 은행이 만들어가고 있다. 2년여 동안 모기지를 못 낸 주택 소유자들도 이렇게 해서 집을 잃지 않고 스스로 살길을 찾아가고 있는 것이다.
이는 매뉴얼에 따라 문제를 해결해 나가려는 기본적 정서가 없이는 불가능하다. 정부가 밝히는 가이드라인을 믿고 따르는 은행과 국민의 무한 신뢰가 없이는 불가능하다. 상황마다 만드는 매뉴얼이 중요한 건 아니다. 기존의 매뉴얼을 믿고 서로 지키려는 국가와 국민 간의 ‘기대심리’가 곧 성숙된 시민사회를 만드는 것이다.
새로운 대통령을 맞이한 대한민국. 국민이 믿고 묵묵히 따르는 정부가 되기 위해선 ‘말로 하는’ 대통합이 아닌, 국민으로부터 신뢰를 얻는 것이 우선임을 전하고 싶다.
김철훈 전 언론인·전 뉴욕 동아일보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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