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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3.03.27 19:34 수정 : 2013.03.27 19:34

일러스트레이션 유아영

지율 스님의 ‘모래가 흐르는 강’을 보고

지율 스님이 다큐멘터리 영화 <모래가 흐르는 강>을 들고 우리 앞에 섰을 때, 나는 잊고 있던 청구서를 받은 느낌이 들었다. 재작년, 그러니까 2011년 여름에 동무들과 스님의 처소에서 하룻밤 묵으며 축낸 감자 값이 아니라 내성천이라는 신의 놀이터를 소개해 주었는데도 아무런 보답을 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 말이다.

강이고 내(川)고 다 망가졌다고 허무와 미움에 빠져 있을 때도 자연은, 생명은 다시 새로운 모습으로 우리 앞에 나타난다는 스님의 시론(詩論)은 나를 잠깐 눈감게 했다. 그건 스님의 천부적인 감각과 재능 때문만이 아니라 천성산 도롱뇽이, 그리고 강과 내가 스님에게 경을 읽어주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우리는 모래에 발을 푹푹 빠뜨리며 냇물 가운데를 걷고 또 걸었다. 그리고 대자연의 경이로움 앞에서 지금껏 알고 있던 언어가 모두 무화되는 느낌이 들었다. 어쩌면 시간도 내성천의 물살 따라 흐르고 모이고 맴돌아 몸뚱이가 변해가는 모래와 같은 것은 아닌가, 하는 상념을 걷는 내내 앓았는데 그것은 분명 혼자만의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영화에 의하면, 그 후 이태 동안 내성천은 처참하게 망가졌다. 그런데 우리는 어찌 그리도 쉬 허무에 도달하는가. 인간이 지닌 의식이란 물건은 생명의 거대한 역사가 순간 응결시킨 그 어떤 것일 뿐이라고 갈파한 사람은 아마도 베르그송이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작란(作亂)은 생명의 흐름을 절대 역류하지 못한다. 인간이 이 사실을 받아들일 때 새로움은 폐허에서도 자라는 법.

내성천이 피폐해져 가기 시작한 것은 인간의 언어가 어디까지 사특할 수 있는지 보여줬던 저 4대강 사업의 시작과 더불어서였다. 바닥을 깊이 갈취당한 낙동강이 누더기가 된 제 수심을 치유하기 위해 지류인 내성천의 모래를 필요로 했던 것이다. 내성천에 있던 모래는 낙동강 쪽으로 급히 휩쓸려갔고 그 때문에 내성천은 아프기 시작했다.

그 마땅한 자연적 현상을 확인하러 몇몇이 달려갔던 것이고, 그걸 확인하고 나서도 우리는 분노 이후를 제대로 살지 못했다. 그사이 상류의 영주댐은 차츰 그 높이를 올렸다. 댐이 완공되고 나면 태초의 모래는 내성천에 다시는 도래하지 못할 것이고 오래된 마을 공동체는 영영 물속에 갇혀버릴 것이다.

이러한 절망의 바닥에 남아서 지율 스님은 걷고 찍고 기록했다. 그리고 마침내 영화 한 편을 화두로 우리에게 던졌다. 작품이 오롯이 작가의 개성과 고투로 만들어진다는 것은 꽤나 그럴듯한 허구다. 작품은 작가가 포착한 세계의 한 단면일 뿐, 그리고 그것이 작품으로서의 위의를 갖는 것은 작가의 영혼이 세계의 이면에 얼마만큼 육박해 들어갔느냐에 달려 있다. 여기서 작가는 물론 꼭 인격체일 필요는 없다.

그 생생한 실례를 강정 마을 중덕해안가에 있는 구럼비 바위에게서 확인한 바 있지만 내성천의 모래 천변도 그러했다. 그리고 다시 <모래가 흐르는 강>은 그것을 거의 신념으로 내 심장에 새겨놓았다. 물론 이 영화는 하나의 이미지다. 그러나 내성천이 가진 1억년 서사와 수몰 예정 지역 할매들이 품고 있는 내성천의 모래알만큼 많은 ‘소설들’이 응축된 이미지라는 것을 잊을 때, 그 망각은 내성천을 1~2년 만에 결딴내는 어마어마한 악업의 숙주가 된다.

스님이 영화를 만들어야겠다고 발심한 것은, 시간의 거대한 흐름을 역류하려는 인간의 망상 때문이었을 것이다. 자연을 지배할 수 있다고 믿고 있는 어리석은 우리의 무의식 말이다. 4대강 사업은 한두 사람이 벌인 일이 아니라 우리 사회가 동의해준 측면이 있다는 스님의 진단이 이를 밑받침한다. 하지만 우리 사회에 그 치명적인 독극물을 포장해 살포시킨 ‘한두 사람’의 책임을 반드시 물어야 하는 건, 분명 속세를 꾸려나가기 위해 필요한 최소한의 책무일 것이다.

지금 강과 내가 우리를 향해 고통에 찬 절규를 보내고 있다. 우리 자신이 모래로 만들어진 존재일진대 모래의 언어를 빌려 외치는 강과 내를 언제까지 모른 척할 수 있단 말인가. 다만 그것이 인간의 언어가 아니라서 알아듣지 못했다면, 그 충실한 번역본인 지율 감독의 영화 <모래가 흐르는 강>을 권해드린다.

황규관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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