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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냐면] 신뢰에 바탕을 둔 사용후핵연료 공론화 / 이헌석 |
정부는 조만간 사용후핵연료 공론화위원회를 출범시킬 예정이다. 2008년 국가에너지위원회에 사용후핵연료 공론화 방안이 제출된 지 정확히 5년 만이다. 사용후핵연료는 중저준위 핵폐기물에 비해 방사선 준위가 월등히 높고 반감기가 길어서 그 처리 방안을 두고 세계 각국이 골머리를 앓고 있는 사안이다. 이에 대해 그간 시민사회 진영에서는 국민적 논의를 거치는 공론화 방식을 줄기차게 요구해왔다. 공론화 방식은 소수의 전문가와 정부 관료들만의 논의로 밀실 협상과 밀어붙이기식 진행, 갈등과 백지화를 거듭했던 과거 전례를 극복할 방식으로 거론되어 왔다. 이러한 측면에서 정부의 이번 공론화 방식 추진은 환영할 내용이다.
그러나 현재 산업통상자원부가 추진하고 있는 사용후핵연료 공론화에는 많은 쟁점이 숨어 있다. 먼저 박근혜 정부 140대 국정과제에서도 언급하고 있는 것처럼 이번 공론화 과정은 박근혜 정부 임기 내 중간저장시설 부지 선정과 착공을 기본 일정으로 맞추고 있다. 중간저장시설의 설치 여부, 착공 시기 등이 이번 공론화 논의의 주요 쟁점이라는 점에서 이러한 계획은 ‘짜맞추기식’ 공론화라는 비난을 면하기 어려울 것이다. 특히 가장 예민한 부분 중 하나인 부지 선정 과정을 5년 안에 완료하겠다는 것은 여러모로 무리한 발상이다. 이번 공론화위원회의 모델이 되고 있는 영국 방폐물관리위원회(CoRWM)의 경우, 2003년 시작된 논의가 지금도 이어지고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둘째 사용후핵연료 문제가 갖고 있는 범부처적 성격을 무시하고 모든 논의가 산업부 주도로 이뤄지고 있는 문제가 있다. 사용후핵연료 문제는 파이로프로세싱 연구 개발을 추진하는 미래창조과학부, 한미원자력협정을 추진중에 있는 외교부 등 범부처적 성격을 띠고 있다. 이들 부서 간 입장 차이는 첨예하다. 이러한 가운데 만약 산업부 주도의 공론화 권고에 대해 타 부처가 반발할 경우 이를 중재할 장치는 아무것도 없다. 그동안 이러한 부분을 우려해 공론화위원회를 대통령 혹은 국무총리 산하에 두는 방식이 수차례 거론되었으나, 이는 이번 공론화위원회와 무관한 일이 되어 버렸다.
셋째 신규 핵발전소 건설이 계속 추진되는 가운데, 핵발전 폐기물인 사용후핵연료 관리를 논의하는 모순이 있다. 지역 주민들이 반대하는 삼척, 영덕 등 신규 핵발전소 부지의 경우, 표면상 ‘유보’한다는 입장이 나왔으나 부지 매입 조사 등 건설을 위한 준비가 진행되고 있다. 한쪽에선 관리 대책 없이 신규 핵발전소를 계속 짓고 있는데, 다른 한편에선 대책을 세워야 한다며 공론화 장에 나오라고 이야기하는 건 앞뒤가 맞지 않는 이야기이다. 사용후핵연료 공론화가 추진되고 있는 많은 나라들 가운데 한국처럼 많은 양의 핵발전소 건설 계획이 추진되고 있는 나라가 없다는 점에서도 신규 핵발전소 증설과 공론화는 동떨어진 주제라는 것이 잘 드러날 것이다.
이 모든 문제 제기의 바탕에는 정부와 원자력계에 대한 ‘신뢰’ 문제가 깔려 있다. 그간 20여년 동안 정부는 지역과의 약속을 손바닥 뒤집듯이 어겨왔고, 한수원 납품 비리, 사고 은폐 등으로 인해 어느 때보다 원자력계에 대한 ‘신뢰’ 역시 바닥 상태이다. 이러한 가운데 사용후핵연료 공론화가 말 그대로 사용후핵연료를 관리할 방안을 논의하는 것이 아니라, 이를 통해 핵발전소 증설의 발판을 마련하고 중간저장시설에 핵재처리 시설 등 소위 원자력 클러스터를 건설하기 위한 것이라는 ‘불신’을 시민사회와 핵발전소 주변 주민들은 갖고 있다. 따라서 정부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이러한 ‘꼼수’가 아니라면, 이런 ‘불신’을 일소시키기 위한 ‘최소한의 장치’가 필요한 것이다.
공론화 과정은 단지 의견을 조율하는 것이 아니라 상호 신뢰를 구축해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핵발전에 대한 찬반 여부를 떠나 공론화의 필요성을 부정하는 이는 거의 없을 것이다. 이때 필요한 정부의 태도는 ‘공론화의 필요성’을 반복적으로 외치는 것이 아니라 불신을 없앨 진정성을 보여주는 것임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이헌석 에너지정의행동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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