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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냐면] 대통령의 방통위원장 임명은 위헌이다 / 방정배 |
대통령이 장관 임명하듯 방송통신위원장을 임명했다. 공영방송의 제1명제가 국가권력으로부터의 독립이란 점에서 그것은 웃음거리다. 권력 종속적 관영방송이나 자본 예속적 상업방송과 달리 방송의 독립과 자유를 법적으로 보장하는 방송제도가 공영방송이다. 따라서 공영방송은 사회공공의 통제원칙과 국민의 방송수신료란 재원조달 원칙에 의해 운용하도록 법제화된다. 공영방송은 관영이나 민방의 약점을 극복하면서도 방송 공익을 최대화할 수 있는 이념형적 방송제도 모델이다. 그래서 우리는 미국과 달리 공영과 민영을 함께 운용하는 이원적 방송제도를 채택했다. <피비에스>(PBS)를 공영방송이라 하여 미국에도 공영방송을 실시한다는 오해가 있다. 수신료 제도가 없는 나라에서 공영방송을 언급하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다.
그런데 권력과 자본의 예속으로부터 방송의 독립을 제도화한 한국에서 어째서 대통령이 사회적 통제기구의 장인 방통위원장을 임명하는가. 방통위원회는 국가 권력기구가 아니고 사회 공공규제기구이므로 대통령이나 국무위원의 임명과 명령에 복종하는 공무원일 수가 없다. 그런데도 우리 법제상 위원들은 공무원이고 위원장은 대통령의 부하인 국무위원의 신분이다. 공영방송 <한국방송>(KBS), <문화방송>(MBC) 임원(이사)을 위원장(위원회)이 전원 선임하고, 이들이 방송사장을 선임한다.
이런데도 방송사장이 국가권력으로부터 독립적이라거나 자유롭다고 할 수 있겠는가. 방송의 정책규제(통제) 기구인 방통위의 위원이 공무원, 위원장이 국무위원, 위원회를 대통령직속 국가부처로 두는 현행법은 공영방송을 부정하는 동시에 위헌적이다. 전형적인 권력예속적 방송제도, 곧 국영방송의 원칙을 따르기 때문이다. 헌법 제21조는 방송의 자유와 독립을 명령하고 있다. 이 경우 방송 자유와 독립은 바로 국가권력으로부터의 그것 아닌가. ‘방통부(部)’가 아니고 ‘위원회’인 진정한 의미는 그것이 국가권력 하이어라키에 종속되지 않는다는 데 있다. 동등한 권한을 가진 위원들이, 합의를 위한 중립적 사회자 구실을 하는 위원장을 그들 가운데서 호선함으로써 권력이나 자본으로부터 독립성과 중립성을 지키자는 것이다.
<한국방송> <문화방송>이 민방의 상업프로그램 서비스와 다른 공익서비스를 제공하지 못하는 원인이 어디 있을까. 공영방송인들이 민방과 달리 제도 보장적 편성 자유를 향유하지 못하는 탓이다. 민방의 방송자유가 인격적 자유 성격이 강하나, 공영방송의 자유는 사회 공익 통제기구의 제도적 요구이다. 곧 제도적 보장이 안 되기 때문에 사장이나 상사에 의한 편성 예속이 보편화한 것이다. 한국 입법자들의 무지가, 오늘의 방통위 제도를 공영방송 제도가 결여된 미국의 방통위(FCC)를 모델로 하여 왜곡·탄생시켰기 때문이다.
영국 <비비시>(BBC), 독일 <아에르데>(ARD), 일본 <엔에이치케이>(NHK) 등 공영방송의 정책기구인 비비시 트러스트, 페른제라트(Fernseh Rat), 엔에이치케이 경영위원회의 구성원리와 독립성을 한번만 주목했더라도 한국 방통위 같은 권력 종속적 기구는 입법되지 않았을 것이다.
지금이라도 우리가 공영방송제도를 유지하려면, 방송정책기구인 독립적 사회공익통제위원회 설치를 명문화한 공영방송 입법을 서둘러야 한다. 그리고 위원들이 이념적·지역적·계층적 이익을 대변할 수 있도록 다원적으로 구성하되, 위원장은 호선하여 중립을 지키도록 함으로써 위원회의 독립성을 확보하게 해야 한다. 기존의 방통위는 민영상업방송의 정책기구로 존치할 수 있을 것이다.
차제에 기존 방송법을 해체하여, 방송광고 판매에 관한 미디어랩법 등을 하나로 묶어 제1부 공영방송법, 2부 민영상업방송법, 3부 방송광고법으로 편재된 통합방송법의 입법을 촉구한다.
방정배 성균관대 명예교수·언론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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