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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3.04.29 19:38 수정 : 2013.04.29 19:38

개성공단이 결국 닫힐 운명에 처했다. 개성공단이 어떤 존재인가? 지난 10년 위태롭고 불안한 남북관계 속에서도 남북을 이어온 마지막 핏줄이 개성공단 아닌가? 안보 위기의 여파가 개성공단 폐쇄 위기로 귀결된 것은 결코 가볍게 여길 문제가 아니다. 병이 나면 몸의 약한 부분부터 탈이 난다. 위기의 구조화·심화로 봐야 한다. 일부에서는 개성공단이 북의 볼모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동독 지역 깊숙이 ‘섬’으로 존재했던 서베를린이 통일 독일의 뇌관 역할을 한 역사적 사실을 분명하게 기억해야 한다.

개성공단의 파탄 위기는 핵무장과 경제 병진이라는 모순된 목표를 내세운 북한의 처사가 근본 원인이다. 한-미 군사훈련에 화풀이하듯 우리 입주업체의 이동을 막고, 자재 반입도 허용치 않은 북한은 비난받아 마땅하다. 하지만 ‘먹고살기 위해 절대 먼저 못 닫을 것’이라거나 ‘유사시 군사조처 고려’ 등의 우리 반응은 문제가 있었다. 대화를 요구하면서도 ‘최후통첩’ 압박을 시도한 정부의 태도 또한 사태 악화에 한몫을 했다. 우리 내부에는 개성공단을 ‘달러 퍼주기’라며 없애버려야 한다고 공공연히 주장하는 사람도 있지 않은가? 개성공단이 남북간의 신경전과 자존심 싸움의 제물이 되어선 안 된다. 북한을 탓하기에는 우리 입주업체와 협력업체들의 처지가 너무도 다급하다. 포기하기는 쉽지만 다시 살리려면 훨씬 힘이 들 것이라는 것은 금강산 사례가 말해 주고 있다.

개성공단이 탄생하기까진 어려움과 우여곡절이 많았다. 2000년 6·15 남북정상회담 이후 경의선·동해선 연결사업과 함께 남북관계의 상징으로 진행된 사업이다. 북한으로부터 토지를 50년간 임차해 건설하고 국내외 기업에 분양해 관리하는 방식으로 추진됐다. 개성직할시 일대에 800만평의 공단과 1200만평의 배후단지를 조성하는 대담한 계획이었다. 그러나 10년 동안 1단계 사업 100만평도 못 채우고 중단 위기에 몰렸다.

북은 북대로 개성공단 추진 과정에서 실망과 불만이 없지 않았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북한 경제의 단번 도약’을 위한 정보기술(IT) 등 첨단산업 유치와 장기적 기술이전을 기대했다. 김 위원장은 “군부의 불만과 반발을 무마하면서 개성을 내줬다”는 말까지 했다. 실제로 북한은 개성지역 2군단 주력 부대와 군사기지를 후방으로 이전시켰다. 그런데도 미국의 부시 정부 등장 이후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면서 개성공단은 여러 차례 고비를 맞고 위축되었다. 휴대전화 조립 공장은커녕 중소기업의 ‘북한 임금 따먹기’ 소비재 생산지역에 그치고 만 것이다. 북은 공단 확장 계획이 합의대로 진행되지 않고, 중국·베트남보다 싼 임금에 대해 늘 불만이었다. 우리가 경제적으로나 정치·군사적으로나 손해 볼 게 없는 일을 마치 선심 쓰듯이 말하는 태도가 달가울 리 없다.

북은 체제의 ‘존엄’을 내세웠다. 경제적 손실과 국제적 고립을 감수하면서 ‘고난의 행군’을 하겠다는 역설적인 체제생존 전략이다. 그 과정에서 북한 주민들은 더 괴로운 생활을 감수해야 한다. 사태를 이렇게 만든 것이 침략자 미국과 못된 남한 때문이라는 북한 당국의 주장에 계속 끌려갈 것이다. 독일은 분단 42년 만에 통일을 이루었다. 1969년 빌리 브란트 총리가 용공으로 몰리면서까지 추진한 동방정책 이후 20여년이 걸렸다. 그동안 우리 돈으로 60조원이 넘는 경제지원을 했고, 수많은 정권교체에도 서독 정부의 기조는 크게 흔들리지 않았다.

분단된 베를린시의 서방지역인 서베를린은 구동독 지역 내부 깊숙이 섬으로 갇혀 있었다. 구소련은 1948년 서베를린 지역 출입을 차단하고 도시 봉쇄에 들어갔지만 연합국의 대대적인 식료품 공수와 압박으로 봉쇄는 11개월 만에 풀렸다. 1961년 동독 정부는 서베를린 지역을 완전히 둘러싸는 장벽을 세웠다. 동독 주민의 탈출을 막겠다는 의도였다. 그러나 서베를린은 고립을 극복하고 ‘자유의 섬‘으로 살아남았다. 그로부터 28년 뒤인 1989년 11월9일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며 통합의 봇물이 터졌다. 이듬해 총선거에서 동서독 통합을 받아들인 동독 주민들의 압도적인 의사가 없었으면 급속한 통일은 어려웠을지도 모른다. 강력한 통일독일의 출현에 대한 주변국들의 불안감과 방해 노력도 없었다.

물론 남북이 처한 현실이 동서독 상황과 곧바로 비교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1989년의 독일과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가 생각해봐야 한다. 개성공단은 냉전 대결의 볼모가 아니라 베를린처럼 통일한국의 심장이 되어야 한다.

지난 이명박 정부는 출범하자마자 ‘잃어버린 10년’을 외쳤다. 김대중·노무현 정부가 한 일들은 대부분 부정되었다. 남북관계를 2000년 6·15 이전으로 후퇴시켜 버렸다. 개성공단은 우리가 남북관계 개선과 평화 관리를 위해서 지켜내야 할 전략적 교두보다. 지금도 늦지 않았다. 북한도 공단 폐쇄라는 최악의 상황을 원치 않고 있음을 내비치고 있다. 박근혜 정부가 이명박 정부의 5년을 연장해서 ‘끝없이 후퇴한 10년’으로 역사에 기록되지 않았으면 한다.

김한정 연세대 김대중도서관 객원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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