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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냐면] 5·18민주화운동과 국민통합 / 김현철 |
1980년 5·18민주화운동이 일어난 지도 벌써 30년이 훌쩍 넘어갔다. 폭동이 ‘민주화운동’으로 정식 규정된 지도 20년째가 된다. 참 긴 세월이 지났는데도 우리 사회의 민주화 논의는 아직 무성하고, 국민통합 역시 절박한 상태라고 할 수 있다.
민주화는 아직도 많은 아쉬움 속에 진행형으로 남아 있다. 6·10 시민항쟁으로 이른바 87년 민주화체제는 이루어졌으나, 시민들의 뜨거운 민주화 열기를 현재의 정치권이 온전히 담아내지 못하고 있다. 질곡의 시대에 민주화 투쟁의 활화산이 되었던 광주를 비롯한 수많은 영령들의 한숨은 멈추지 않고 있다.
노태우 정권에서 군부독재가 균열되면서 민주화의 물결이 서서히 형성되었다. 당시 정치권은 군부독재세력과 민주화세력 간의 힘겨루기 속에 지역을 기반으로 하는 정당들이 각자 도생하는 경쟁에 몰두하게 되었고 국민통합 역시 진정한 성찰 없는 합종연행으로 미봉책에 그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미완성의 민주화와 통합은 지금까지 진행형으로 남아 있다.
문민정부 이전까지 5·18민주화운동도 올바른 개념 정립이 이루어지지 못하고 계속 ‘민중폭동’으로 남아 있었다. 어렵게 문민정부가 출범하면서 비로소 폭동에서 ‘민주화운동’으로 공식 규정될 수 있었다.
갓 출범한 문민정부는 1993년 5월13일 광주민주화항쟁 관련 특별담화를 발표한다. “광주민주화운동은 이 나라 민주주의의 밑거름”이라고 성격을 규정하고, 새 정부를 “광주민주화운동의 연장선상에 서 있는 민주정부”로 선언하였다. 나아가 기념사업 지원, 보상과 명예회복 및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발표했다. 결국 95년 12월21일 ‘5·18민주화운동 등에 관한 특별법’이 제정되면서, 전두환·노태우 등 관련자들을 엄정히 처벌하게 된다.
돌이켜 보면, 참으로 어렵고 지난한 과정일 수밖에 없었다. 무엇보다 관련 당사자들이 엄연한 정치사회권력으로 현존하는 상태에서, 5·18을 민주화운동으로 규정하는 것은 대단히 큰 결단이 필요했다. 자칫 잘못하면 정치사회적으로 혼란만을 불러올 가능성이 컸다. 실제로 내부 논의 과정에서 일부 군부(보수)세력의 반발을 우려해 특별담화를 조심스러워하고 반대하는 목소리도 있었다.
그러나 5·18을 민주화운동으로 규정하는 것은 5·18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길게 보면 해방 이후 4·19, 부마항쟁, 광주민주화운동, 6·10시민항쟁으로 이어지는 민주화운동의 역사적 정통성을 바로 세우고, 앞으로 우리나라가 나아가야 할 정치사회적 방향을 제시하는 엄청난 역사적인 결단이었고, 하나회 등 독재 잔재를 청산하고 국민통합을 이루어 선진일류 국가로 거침없이 나아가는 길을 열어야 하는 당시의 시대적 역사과제였다.
민주화운동에 몸담았다 문민정부에 참여한 참모들과 필자는 이러한 인식 하에 특별 조처를 대통령께 건의했고, 대통령의 결단으로 담화가 발표되었다. 역사적 분기점은 이렇게 해서 만들어졌던 것이다.
어느 나라 역사든 올바른 역사발전을 위해서는 화해와 통합이 매우 중요하다. 갈등이 어느 시대에나 존재한다고 하더라도, 우리 사회에서 이념·지역·계층·세대의 분열과 갈등이 심화·분출하고 있다는 사실은 실질적인 민주화와 통합이 아직 매우 미흡하다는 징표일 것이다. 5·18민주화운동은 이러한 실질적 민주화와 통합에 대한 하나의 바로미터가 되는 것이다.
사회가 발전함에 따라 시대적 과제도 변화한다. 국민적 통합 없이는 변화하는 시대적 과제에 능동적으로 대처할 수 없다. 개인의 파벌적인 이해관계가 아니라 공동체를 위한 공공의 이익을 우선하는 의식 형성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현실적으로 진보와 보수, 영호남, 그리고 세대간 모든 세력의 성찰과 화해가 전제되어야 진정한 통합도 가능하다. 역사는 끊임없이 성찰과 통합을 요구한다. 자기성찰과 나눔이 무엇보다 필요한 시대이며 이는 특히 정치권이 명심해야 할 과제다.
김현철 고려대 지속발전연구소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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