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3.05.08 19:34
수정 : 2013.05.08 19: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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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레이션 김선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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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 <이오지마에서 온 편지>는 태평양전쟁 최대의 격전지였던 이오지마에서 일어난 전투를 그리고 있다. 이오지마는 사이판과 일본 사이에 있는 섬으로 면적은 여의도의 3배 정도에 불과하다. 그 작은 섬에서 애초 5일 정도로 예상되었던 미군의 상륙작전은 25일을 넘겼다. 그러면서 미군 6000명, 일본군 2만명이 사상했다. 당시 일본군을 지휘한 구리바야시 다다미치 대장의 임무는 적의 진격을 물리치는 것이 아니라 최대한 지연시키는 것이었다. 수세에 몰렸던 그는 아들에게 편지를 썼고, 그 편지가 훗날 발굴돼 세상에 공개되면서 이오지마 전투는 더욱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구리바야시 대장의 외손자가 신도 요시타카 총무상이다. 2011년 울릉도 방문을 시도하다 김포공항에서 입국을 거부당했던 바로 그 인물이다. 4월23일 168명의 의원들의 야스쿠니신사 집단 참배에 앞서 그는 21일 오전에 야스쿠니신사를 참배했다. 각료로서가 아닌 개인적인 참배라고 했다. 일본은 늘 이런 식이다. 주변국과 마찰을 일으킬 행위라는 것을 스스로 잘 알고 있다는 의미다. 개인 자격을 핑계로 대는 것은 그들 자신도 너무나 명백히 아는 역사적 사실들과 헌법적 제약 때문이다.
야스쿠니신사가 문제가 되는 것은 14명의 에이(A)급 전범들이 합사되어 있기 때문이다. 또 전쟁에 강제 동원되었던 한국인 2만여명이 일본 국가와 일왕을 위해 사망한 자들이라는 명분으로 합사되어 있기 때문이다. 한국의 분사 요구에 대해 일본은 “교리상 영령들의 분리는 불가능하며, 합사는 메이지시대 이래의 전통으로 사전 승인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변명만 늘어놓고 있다.
야스쿠니신사는 1868년 메이지 2년, 막부를 쓰러뜨리고 일왕을 세우기 위해 싸우다 숨진 영혼들을 ‘호국의 신’으로 모시기 위해 지어진 신사(神社)에 해당한다. 신사는 신도(神道)의 사당들을 말한다. 당시 메이지 일왕은 신도의 수장으로 받들어져 신격화된다. 그러나 태평양전쟁의 종료 이후 일본을 점령한 연합군 총사령부가 일왕 스스로 인간임을 밝히는 ‘인간 선언’을 이끌어 내면서 일왕은 신도와 분리되었다. 연합군은 또 야스쿠니는 종교 시설이나 전몰자 추도 시설 중 하나로 남아야 한다고 일본에 요구했고, 일본은 종교 시설을 택했다. 이와 함께 1947년 수립된 일본 신헌법은 일왕을 상징적인 국가수반으로 삼는 ‘상징 천황제’와 ‘정교 분리’를 규정하고 있다.
이런 사실을 종합하면 일본 총리나 각료가 특정 종교 시설에 해당하는 야스쿠니에 참배하는 것은 헌법을 무시하는 것이다. 게다가 1978년에는 종전 뒤 있었던 도쿄재판의 에이급 전범 14명이 합사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각료의 야스쿠니 참배는 도쿄재판을 부정한다는 의미다. 올해 3월 “도쿄재판은 승자의 단죄”라는 아베 신조 총리의 발언도 같은 맥락에 있다.
“1차 아베 내각 때 야스쿠니에 참배하지 않은 것이 천추의 한”이라고 말한 아베 총리의 발언으로 볼 때 그가 이번에는 참배 대신 화분 모양의 공물을 보냈지만 7월 참의원 선거에서 승리하고 나면 참배를 강행할 것이 불을 보듯 뻔하다.
“창씨개명은 조선이 원한 것이었다”는 망언의 주인공으로 미국 방문에서 돌아오자 곧바로 야스쿠니로 달려간 아소 다로 부총리, 미국 뉴저지주까지 가서 일본군 위안부 기림비의 철거를 요구한 후루야 게이지 국가공안위원장 등 수많은 각료와 정치인들이 야스쿠니신사에 참배했다. 이들 모두가 머리를 조아리고 있을 동안 신도 총무상과 같이 제국주의 시절 그들 선조가 보여준 일왕에 대한 충성과 일왕 중심의 일본을 가슴에 새길 것을 생각하면 두렵고 안타깝다. 헌법을 고치고 일왕을 국가원수로 하는 것은 과거로 돌아가는 길이다. 미래를 향해 나아가려면 응당 야스쿠니를 버리고 과거를 반성하는 용기에서 시작해야 할 것이다.
최운도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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