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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3.05.15 19:30 수정 : 2013.05.16 09:00

일러스트레이션 김선웅

16일 개봉하는 영화 <위대한 개츠비>의 원작 번역본에 대한 과열 판매 경쟁이 입길에 오르고 있다. <위대한 개츠비>는 미국 모더니즘 소설가 에프. 스콧 피츠제럴드의 대표적인 소설이다. 이 소설이 20세기 소설 100권 목록 가운데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에 이어 2위를 차지하였다는 것만으로도 그 위대성을 가히 짐작할 수 있다. 이 소설이 다시 리어나도 디캐프리오 주연의 3차원 영화로 제작되었으니 원작에 대한 관심이 새롭게 일어날 만하다. 무려 40여종이 넘는 번역본의 열띤 판매 각축전은 우리의 열악한 출판시장에 오히려 호재가 될 것이라며 일각에서는 반색하는 분위기다.

그러나 번역본 가운데 경쟁력 있는 두 출판사의 번역본이 과도하리만큼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다. 하나는 국내 저명한 영문학자가 공들여 번역한 것을 반값에 할인 판매하고 있으며, 다른 하나는 중견 소설가의 번역본과 원본을 영화 예매권까지 함께 저렴하게 공급하고 있다. 지난겨울 영화 <레 미제라블>에서 확인한 것처럼, 문학의 확장으로서 영화의 위력은 실로 대단하다. 출판시장을 활성화시키며 문학 고전을 복원시키는 이런 현상에 감사해야 할 것인가? 아니면, “자본주의 힘에 압도되어 기꺼이 혹은 무력하게 몸을 파는 처지로 전락한 문학의 현황에 대한 개탄과 탄식”(김경식)을 해야 할 것인가?

바야흐로 소설이 상품화된 시대에 살고 있다. 만물이 상품화된 ‘절대 자본주의’ 시대에 소설의 ‘위대성’이 속절없이 사라진 것에 대해 애도를 표한 가라타니 고진의 <근대문학의 종언>을 비웃기라도 하듯이, <위대한 개츠비>는 그 위대성을 뽐내며 불티나게 팔리고 있다. 그런데 왜 이 현상 앞에서 불현듯 루카치의 <소설의 이론>의 그 서정적인 첫 문장이 떠오르는 것일까? 한 편의 시와 같은 이 문장은 이렇게 시작한다. “우리가 갈 수 있고, 또 가야만 하는 길을 밤하늘의 별이 환히 밝혀주는 시대는 얼마나 행복했던가?” 이 책에서 루카치는 소설이란 “문제적 주인공이 본래의 정신적 고향과 삶의 의미를 찾아 길을 떠나는 동경과 모험으로 가득 찬 여정”이라고 정의했다. 이 문장이 생각난 것은 아마도 <위대한 개츠비>의 주인공도 자신의 영혼을 입증하기 위해 길을 떠났기 때문이었으리라.

그러나 루카치의 별이 새삼 떠오른 것은 모든 것이 상품화된 이 시대에 독자들 마음에 아련히 간직되어 있는 낭만적인 이상향을 그 별이 희미하게 비추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위대한 개츠비>가 세월이 흐를수록 독자들의 사랑을 받고, 다시 읽히는 이유는 개츠비가 옛사랑을 회복하려는 순수한 열정의 화신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것은 그가 물질세계와 세속적 욕망을 넘어서는 “낭만적 감수성”과 “창조적 기질”을 지닌 인물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개츠비가 비록 사랑을 위해 짧은 시간에 엄청난 부를 축적한 문제적인 주인공일지라도, 그가 물신화된 세계에 끝내 포획되지 않고, 잃어버린 영혼을 회복하려 했다는 점에 그의 위대성이 있다.

개츠비가 돌이키고 싶었던 과거는 “행복에 마비되고” “돈으로 가득한 목소리”를 지닌 데이지와의 순수한 사랑이 아니라, 루카치가 상실한 밤하늘의 별이 길을 안내하는 그 총체성의 세계, 곧 인간의 소외가 소멸된 세계일지도 모른다. 그런 점에서 이 소설을 “표적을 빗나간 화살이 끝내 명중한 곳”(김영하)이라고 할 수 있다. 결국 개츠비는 타락한 자본주의 사회에서 진정한 가치를 위해 유토피아적 불가능성과 싸우다가 쓸쓸히 사라져 버린다. 그가 겨냥한 화살은 돈도 명예도 사랑도 아니었으리라. 그것은 어쩌면 사람과 자연이 조화를 이루고, 개인과 세계가 균열되지 않은 총체성의 시대를 표적으로 삼았던 것일지도 모른다. 바로 여기에 <위대한 개츠비>의 위대성이 숨어 있다. 피츠제럴드는 이 소설에서 1920년대 소비자본주의가 그 절정의 순간에 도덕적 쇠락을 맞이하고, 결국 파국에 이르게 될 것이라는 것을 개츠비를 통해 보여줌으로써 루카치의 낭만적 반자본주의의 이상을 수려한 산문으로 채색하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끊임없이 그에게로 돌아가고 있는 것이다. “시대를 역류해서… 과거 속으로” 말이다.

그렇다면 지금 벌어지고 있는 출판시장의 번역본 과열 판매 양상은 <위대한 개츠비>의 이런 위대성에 총을 겨누고 있는지도 모른다. 마치 이 소설에서 노동자 윌슨이 수영하고 있는 개츠비의 등에 총을 겨누고 있듯이….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김상률 숙명여대 영문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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