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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3.05.20 19:27 수정 : 2013.05.20 19:27

이 글은 아베 총리에게 보내는 공개 서한 형식이다. 정치적 논의가 아닌 개인적 견해에 대한 것으로, 일본이 저지른 범죄와 관련된 세 논점에 대해 썼다.

귀하는 “침략의 정의는 불확실하다”고 했다. 정의에는 이론적 정의와 실무적 정의가 있다. 한 예로 ‘질량’을 보자. 이론적 정의는 “물체가 가진 물질의 양”인데, 언뜻 쉽지만 실제로는 어렵다. 이를 명확히 이해하려면 ‘물체·물질·양’을 정의해야 하는데, 그러려면 다른 용어들이 필요하고, 결국 무한회귀에 빠진다. 한 해결책이 실무적 정의이다. 실무적으로 질량은 ‘양팔 저울’로 쉽게 정의된다. 기준 질량을 한쪽에 올리고 다른 쪽에 대상을 올린 뒤 비교하면 간단히 가려진다.

침략의 이론적 정의도 좀 어렵다. 그러나 일반인도 쉽게 이해할 게 분명 있으며, “다른 나라의 주권, 영토보전, 정치적 독립에 대한 무력행사”라는 게 그렇다. 다만 귀하는 학자가 아니어서 혼란스럽다고 하자. 그러면 실무적 정의가 좋을 텐데, 가장 적절한 게 일본이 저지른 전쟁들이다. 실제로 여러 자료에는 일본의 만행들이 침략의 예로 뚜렷이 나와 있다. 따라서 정의가 혼란스럽다는 궤변은 반성하고, 올바른 실무 공부로 올바른 실무 수행에 나서야 한다.

침략을 인정했다 치고, 사면의 본질을 보자. 죄를 지어도 사면되면 죄마저 사라질까? 성경을 보면 죄 사함은 많아도 원상회복까지 해주는 대목은 없다. 인간의 사면은 물론이고 신의 사함도 벌의 면제일 뿐, 죄의 삭제가 아니다. 필자는 종교인이 아니다. 하지만 기독교의 신을 전능한 신의 예로 볼 때, 이런 존재가 죄를 사할 뿐 원상회복을 않는다는 점은 중요하다. 신이 못한다면 인간은 더욱 못한다. 또한 신이 하지 않는 것을 인간이 할 수도 없다.

귀하는 헌법 개정으로 군대를 정비한 독일에 비하면 일본은 억울하다고도 했다. 하지만 현재의 독일은 2차대전 이전으로 회복한 것이 아니다. 독일은 전세계가 수긍할 정도로 사죄하고, 나치와 철저히 결별하여 새 독일로 거듭났다. 일본도 궤변의 참배가 아니라 진정한 참회로 거듭나야 한다. 개인은 죽으면 그만이다. 하지만 국가는 세월이 흐르면 새 국민들로 다시 채워지므로 진정하게 거듭날 수 있다. 다만 선대의 죄를 참회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몸만 거듭날 뿐 선대의 죄는 원죄처럼 물려진다.

사면되었다 치고, 이후의 길을 보자. 일본은 ‘라인강의 기적’이라는 독일의 부흥을 뛰어넘어 제2의 경제대국이 되기도 했다. 하지만 다른 분야에서는 그런 적이 없다. 왜 그랬을까?

필자는 결정적 원인을 정신적 미숙으로 본다. 일본은 민주주의를 시행했다지만 다년간 일당독재 안의 파벌 정쟁만 계속했는데, 겉으로는 안정되었기에 모범적으로 운영한다고 자처했다. 그러나 내막은 후진적이었고, 아니나 다를까, 아시아 최초의 평화적 정권교체는 대한민국에서 이루어졌다. 경제도 건강한 민주경제가 아니라 통제된 관료경제의 소산이었다. 한마디로 해바라기처럼 추구했던 서구 체계들이 신정 같은 왕정이나 편협적·강박적·폐쇄적·배타적·집단우선적·사춘기고착적·피해망상적·호전적인 기질 등의 정신적 미숙 때문에 발전이 막혔다. 1980년대에는 경제적으로 최고에 오를 듯 등등했지만 극적 반전이 나타나 불황의 늪에 빠졌다. 위의 정신적 특성들은 뒤쫓기에는 유리하지만 앞서기에는 취약했던 것이다.

근래 일본이 다시 떠오르는 기운이 엿보이는데 원동력을 예전의 미숙함에서 얻으려 한다. 그래서 차세대 세계의 중심지가 될 출발점에 선 동아시아는 발걸음을 제대로 떼지 못하고 있다. 핵무장의 북한이 위험하다지만 오히려 일본이 더 큰 덫이다. 일본은 재삼 숙고하여 진정한 아시아의 공영을 통해 세계의 평화와 번영에 기여할 올바른 길로 나서야 한다.

고중숙 순천대 화학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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