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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냐면] 유족이라는 이름 / 정석희 |
죽은 사람의 뒤에 남는 가족을 유족이라 하던가. 아직도 이 땅에는 평생을 유족이라는 이름으로 살아야 하는 사람들이 있다.
6·25 한국전쟁 중 인민군이 남침하는 과정에서 잠시 부역을 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9·28 수복 후 우리 집도 할아버지·할머니·아버지·삼촌이 경찰에 끌려가 총살당하였다. 빨갱이 집안은 삼대를 멸족시켜야 한다는 광풍이 그대로 우리 집에도 불어닥친 셈이다. 당시 세 살의 어린 나이 때문이었을까 가까스로 살아남을 수 있었던 나는 본의 아니게 고아의 신세로 전락하여 빨갱이 새끼라는 또 다른 낙인을 달고 불가촉 천민처럼 대한민국 밖의 비국민으로 사회적 진출을 거세당한 채 연좌제 사슬에 묶여 살아야 했다. 나 같은 사람이 어디 나 혼자뿐이겠냐고 자위도 해 보았지만 지금 칠십을 바라보는 이 나이에도 그 아픈 세월은 쉽게 잊을 수가 없다.
4·19와 5·18, 6·10 민주항쟁을 거치면서 그래도 이 땅은 민주주의가 살아 숨쉬는 곳이구나 하는 믿음과 함께 자유민주주의의 근간을 무너뜨린 반인륜적 국가범죄 행위는 국가 스스로가 반드시 결자해지할 것이라는 기대를 버리지 않았다. 그런데 이게 웬 말인가. 지난 5월16일 대법원은 국가배상 판결에서 과거사법 자체를 무시하는 판결로 사법부가 유족들에게 오히려 대못질을 하는 가학 행위를 한 것이다.
그래도 기댈 곳은 사법부밖에 없다는 심정으로 우리 유족들은 대법원의 정의로운 판결을 기대했던 것이 사실이다. 사법부가 내세우고 있는 자유·정의·평등은 돌아가신 희생자들의 염원이었으며 지금 현재를 살고 있는 우리 모두의 희망이기 때문이다. 국가의 조직적 인권유린 행위가 분명한데도 이번 대법원 판결에서 말하는 추가 증거조사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죽은 사람은 있지만 그 죽음에 대한 소명이 부족하니 추가 증거조사가 필요하다는 것인가? 60여년이 지난 국가적 사건을 당시 모든 책임을 지고 있던 국가가 나서 해결하기는커녕 누가 이제 와서 누구보고 추가 증거조사를 하라는 것인지도 의아스럽다. 실체적 조사의 당사자였던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 위원회’의 진상규명 조사 결과에 대해서조차 부정하고픈 속내는 아닌지, 아니면 죽은 자가 하늘에서 내려와 법정 증언을 해주길 바라는 것은 아닌지?
진실화해위원회는 2005년 5월3일 여야 합의로 국회를 통과한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 기본법’에 의거하여 꾸려진 부정할 수 없는 국가조직이다. 그 국가조직이 5년여에 걸쳐 진실규명 하는 과정에서 증인들의 구술·녹취·진술·현장확인 등 수많은 조사 내용을 싸잡아 부정한다면 국가가 곧 위증하는 꼴이 되고 말 것이다. 추가 증거조사보다 더욱 분명한 것은 그 죽음 뒤에 남겨진 유족이다. 어떠한 추가 증거조사보다 그 유족들이 60년 세월을 어떻게 살아왔는지 들어보면 분명해진다.
한국전쟁 유족들은 경제적 주체인 아버지를 잃다 보니 돈이 없어 대부분 교육의 기회를 잃었고 교육을 받지 못한 탓에 일찍부터 가난과 굶주림의 나락에서 허덕여야 했다. 국가적 연좌제가 아니더라도 그들은 이미 사회적 밑바닥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같은 땅, 같은 하늘 아래에서 땅을 치며 통곡하는 국민이 아직도 60년 한을 품고 살고 있다면 진정으로 국민이 행복한 나라는 과연 어떠한 나라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정석희 한국전쟁유족회 상임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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