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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냐면] 국정원의 폭거, 신뢰 잃어가는 대통령 / 김한정 |
국가정보원이 2007년 남북정상회담 대화록을 전격 공개했다. 국정원의 대선 개입 의혹에 따른 정권의 정통성 시비를 덮으려는 극약처방으로 보인다. 대통령기록물을 국가정보기관 수장이 무단 공개하는 것은 불법일 뿐 아니라 월권이다. 앞으로 남북대화가 어떻게 되든 상관하지 않겠다는 태도다. 정상적인 국가라면 국정원은 기밀 유출자를 잡으러 다녀야 한다. 그런데 국정원장이 나서서 조직의 명예를 지키려 한 일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국가 최고급 외교 행위의 비밀, 그것도 남북정상회담의 내용을 상관인 대통령과 상의도 하지 않고 공개하고 유포하는 일을 스스럼없이 할 수 있다면 그가 이제 대통령이다. 청와대가 아무런 말이 없는 게 기이하다. 국정원의 명예와 권위는 비밀 엄수에서 나온다. 정치에 개입하지 않고 국가안보에 전념할 때 지켜진다. 안보정보 수집과 대북 심리전에 투입해야 할 직원들을 대거 빼돌려 대통령 선거에서 댓글 조작을 시킨 것이 명예인가?
국정원의 대선 개입은 국기문란이고 범죄행위이다. 에스엔에스(SNS) 공작 활동을 하던 국정원 직원이 발각되었고, 경찰 고위층의 수사 은폐 시도도 드러났다. 검찰의 배후 수사에 대해 법무부 장관은 드러내 놓고 압력을 가했다. 국정원 댓글 공작은 과거 독재정권 시절 숨어서 흑색선전물로 하던 정치공작을 이제 인터넷을 통해 대놓고 한 것과 마찬가지다. 더 효과적이고 더 광범위한 선거 개입이다. 국정원의 조직 속성상 원장의 지시나 비호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국민들이 철저한 수사를 요구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박근혜 대통령은 국정원의 대선 개입이 자신이 지시한 일이 아니고, 스스로도 국정원 덕을 본 일이 없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철저 수사를 지시하고 엄단하는 게 상식이고 정도다. 그러면 정통성 시비도 사라진다. 전임 정권의 국정원이 저지른 일 때문에 현직 대통령을 임기 도중에 물러가라고 요구할 국민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 청와대는 정도를 버리고 정략을 선택했다. 국정원 의혹 해소를 위한 특단의 조처를 기대했는데, 여권과 국정원이 꺼내든 것은 ‘노무현 대통령의 서해 북방한계선(NLL) 발언’ 카드였다. 물타기와 정국 이슈 돌리기다. 지난 대선 때 보수 결집을 노리면서 활용한 ‘정상회담 영토 포기 발언’ 정치공세를 재탕한 것이다. 청와대는 이번 사태를 방치했다. 대한민국의 대통령이 영토 포기 발언을 하고 마치 비굴한 회담을 한 것처럼 사실을 왜곡한 국정원 문건이 돌아다니고 여당 국회의원의 입으로 유포되고 있어도 ‘정치권의 일’이라며 모른체했다. 그 과정에서 엔엘엘 ‘유지’가 ‘포기’로 뒤바뀌고, ‘6자회담 결과를 보고해줘서 고맙다’는 말이 ‘김정일에게 보고하게 해줘서 고맙다’로 둔갑돼 널리 퍼졌다. ‘이런 사람이 대통령이었다니’라는 캠페인을 벌였던 셈이다. 하지만 정치에도 도덕이 있고 최소한의 윤리가 있다. 박 대통령도 임기를 마치면 전직 대통령이 된다. 아직도 ‘노무현 때리기’인가?
국정원의 ‘반란’과 청와대의 모른체를 보면서, 박근혜 후보를 지지하지 않은 48% 국민들의 마음속에서 이제 대통령은 없어져 간다. 앞으로 대통령이 ‘신뢰’와 ‘대통합’을 이야기해도 믿으려 들지 않을 것이다. 중립적인 국민들 안에서도 ‘이건 아닌데’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늘어갈 것이다. 국내의 정치적 위기를 모면하려고 남북정상회담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대선 개입이라는 중대 범죄의 의혹에 휩싸여 있는 국정원을 감싸는 대통령에게 정의로운 정치를 기대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남북관계를 개선하고자 하는 시도가 이번 일로 발목이 잡힐 우려도 적지 않다. 북한은 반발의 구실을 얻었다. 오늘 박 대통령은 중국의 지도자를 만난다. 정상회담의 내밀한 대화를 쉽게 까발리는 상대와 마음을 터놓고 논의할 수 있을까? 말로는 ‘신뢰 프로세스’인데, 북한에 항복을 받기 위한 압박을 요청한다면 중국이 팔을 걷고 거들어줄까? 중국이 당사자인 남북의 직접 대화를 권유하면 어떻게 할 것인가? 우리는 북한과는 상대하지 않겠다고 할 것인가? 꽉 막힌 남북관계의 현실과 북한 체제의 속성상 남북정상회담은 돌파구를 여는 결정적인 정책 수단이다. 역대 정상회담을 성사시키는 데는 국정원의 역할이 컸다. 그런데 비밀을 준수하지 않는 국정원을 북한이 협상의 채널과 상대로 받아들이려 할까?
국정원의 ‘남북정상회담 대화록 폭로’는 국정원의 존재 가치를 스스로 망친 폭거다. 지난 대선 개입에 이은 또다른 정치공작이다. 남북관계 개선이 우리의 국익을 위한 엄중한 시대적 과제라는 사실을 조금이라도 생각한다면 감히 할 수 없는 일이다, 외교 관례도 무시하고, 국가기록물법도 무시하고, 관련 사실도 왜곡한 정치적 협잡물이다. 조직의 생존을 위해 남북관계에 대한 전략적 고려도 아랑곳하지 않는 국정원, 국가정보기관의 대선 개입 범죄를 덮으려고만 하는 청와대, 이념논쟁을 불붙여 정치적 이익을 도모하겠다는 정권이 과연 정통성을 인정받을 수 있을까?
세계 경제의 구조적인 불안이 한국을 덮치고 있다. 미국·일본·중국의 금융 불안이 맞물려 있고, 우리 경제도 낙관할 수가 없다. 내년에 민생이 더 고달파졌다는 여론이 확산되면, 정권 내부에서는 책임을 놓고 갈등과 권력투쟁이 벌어질 것이다. 역사의 법칙이고 단임제 대통령제의 저주다. 대통령의 권위와 파워는 급속히 추락할 것이다. 정통성 시비는 오히려 이럴 때에 정권을 아프게 때릴 것이다. 국민은 경제가 어렵다고 곧바로 지도자를 원망하지 않는다. 1998년 외환위기라는 극도의 고통 속에서 우리 국민은 금 모으기에 나섰고 구조조정이라는 아픔을 받아들였다. 지도자의 눈물과 도덕성을 믿고 정부를 신뢰했다. 그래서 조기에 외환위기 극복이 가능했다. 신뢰의 위기가 국가적 불행을 부른다는 사실을 청와대는 알아야 한다. 대통령이 ‘나와 무관한 일’이라고 말한다고 곧이곧대로 받아들일 국민은 없다.
김한정 연세대 김대중도서관 객원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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