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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3.07.08 19:41 수정 : 2013.07.08 19:41

호랑이가 포효하고 곰이 뒹굴고 원숭이의 익살이 있고 학 한 마리의 섬세한 몸짓이 화면을 꽉 채우고 있었다. 심청전과 춘향전의 버전도 있다. 도저히 흉내내기 어려운 미학적 아름다움의 정점이다.

1991년 6월, 문화방송은 <우리 시대의 명인>이라는 프로그램을 통해 공옥진을 1인 창무극이라는 새로운 장르로 세상에 알리고 있었다. 저녁상을 물리고 텔레비전을 시청하던 필자는 목덜미에 소름이 끼치는 전율을 억제하기 어려웠다. 꾸물거릴 일이 아니여서 지체 없이 문화방송 선배인 송창의 피디와 홍종명 피디에게 연락을 취해 공옥진 여사의 1인 창무극을 원주에서도 볼 수 있도록 주선해 달라고 청을 넣기에 이른다. 얼마 후 공옥진 여사와 통화를 할 수 있었다.

공옥진 여사의 답변이 걸작이다. “남도 촌에 사는 할망구 허는 짓거리가 뭐시 좋다고 여그까지 전화한당가?” 그해 가을 ‘1인 창무극 공옥진’이라는 타이틀로 원주 공연이 확정되었다. 춤사위가 꿈틀거리는 공연 포스터가 붙여지고 자사 매체를 통한 공연 광고가 송출되면서 공연 사흘을 앞두고는 매진사례를 이루었다.

객석의 조명이 모두 꺼졌다. 장고·북·대금·징·아쟁·거문고·꽹과리를 치는 악사들이 무대 오른쪽에서 연주를 시작하면 한복 차림의 공옥진이 전통 춤사위를 보여준다. 박수가 터져나온다. 걸쭉한 사설을 풀어놓는 심봉사와 심청의 이별 장면에서는 객석 여기저기에서 훌쩍이는 장면이 목격되기도 한다. 그러다가 치맛단을 겨드랑이 위로 올리면 금세 난장이가 되고 허리를 바싹 오그려 곱사춤을 춘다. 춘향전의 이도령과 성춘향이 만나는 대목에서 공옥진은 갑자기 객석까지 내려가서는 남자 어린이를 무대로 올라오게 한다.

“서방님?” 영문을 모르는 사내아이는 공옥진이 갑자기 서방님이라고 부르자 민망해서 어쩔 줄을 모르는데 “서방님 올해 춘추가 얼매라우? 나이가 얼맨기라우?” “열한살이요.” “으따 이 옥진이가 오늘 횡재해 부렀네이.” 객석은 또 까르르 웃는다. “서방님, 아 글시 이 고을 사또 잡것이 자꾸 찝쩍대는디 어찌하면 좋을 게라우?” 어린이가 대답을 미적대자 공옥진 여사는 치맛속을 뒤져 만 원짜리 지폐 두 장을 어린이에게 쥐여주며 대답을 재촉한다. “아니다, 춘향아 나한테서 떠나지 말거라!” 또 객석은 박장대소를 한다. 공옥진의 즉흥적인 연기이다. 공옥진의 끼는 끝이 없었다.

꽹과리를 치며 이어지는 공옥진의 살풀이는 깊어가는 가을밤의 서사시였다. 공연이 끝냈을 때 막 회갑을 넘긴 공옥진은 온몸이 땀으로 뒤범벅이었다. 관객은 모두 일어서고 기립박수가 끊이지 않는다. 공옥진이 다시 무대에 나와 인시를 하지만 그래도 박수가 끝나지 않자 힐끔 악사들을 쳐다보더니 무대를 겅중겅중 뛰기 시작한다. “꽃피는 동백섬에 봄이 왔건만” 난데없이 조용필의 ‘돌아와요 부산항에’를 부른다. 이 시대의 보기 드문 춤꾼이고 광대의 끼다.

다음날 공옥진은 남한강 인근의 수석 가게를 꼭 들러 가겠다기에 충주시 엄정면 목계리의 수석 가게까지 동행하게 되었는데 한참을 눈여겨보던 공 여사는 자그마한 오석에 여인이 춤을 추는 듯한 소품을 들고 주인장을 찾는다. 돌 하나 가격이 25만원이란다. 돌값은 좀 깎아야 된다고 넌지시 귀띔을 하자 “나 같은 춤꾼이 시방 수석 안에 또 있는디 값이 뭔 상관이여?”라고 말하며 맑게 웃는다.

덩실덩실 춤을 추는 모습이 담긴 수석을 쓰다듬으며 차에 오르던 공옥진 여사를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그 후 몇 해 동안은 전남 영광으로 공 여사의 근황을 묻다가 언젠가부터 시지부지하게 세월을 보냈다. 오늘이 81살로 타계한 공옥진의 1주기이다. “공옥진 여사시여, 당신은 이 시대에 다시 보기 힘든 명인이었고 춤꾼이자 광대였습니다. 그런 당신을 오랫동안 홀대해온 우리 모두가 한없이 부끄러운 여름입니다.”

한필수 전 원주문화방송 편성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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