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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3.07.11 19:03 수정 : 2013.07.11 23:45

이 글은 조한혜정 연세대 교수의 칼럼 ‘시간이 머무는 길, 모래가 흐르는 강’(<한겨레> 4월3일치 30면)과 이강원 세계장신구박물관장의 글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외곽 담장 설치에 대하여’(<한겨레> 7월2일치 33면 왜냐면)에 대한 반박글이다.

1970년대 후반 도서관에 자리를 잡기 위해 새벽에 집을 나가야 했다. 이른 새벽 종로에서 내려 조계사 앞과 풍문여고와 덕성여고를 거쳐 가는 감로당길을 통해 정독도서관에 도착했다. 청년 시절과 직장생활, 지금은 문화 활동으로 자주 이 길을 다니지만 변해도 너무 변해 버렸다. 그동안 감로당길과 화동길을 다닌 사람에게는 추억과 기억으로 가슴이 시리겠지만, 상업적으로 변해버린 현재의 모습에는 실망이 클 것이다.

지금의 정독도서관은 조선시대 화초와 과물을 관리하는 장원서라는 관청이 있었는데, 우리가 잘 아는 단원 김홍도가 1773년 장원서 별제(종6품)로 임명되었고, 이후 사포서(궁궐의 밭과 채소 경영을 관장하던 관청) 별제로 전보되었는데 스승인 강세황과도 함께 근무했다. 이 시절 화초와 과실, 야채 등을 관찰한 김홍도의 화풍에 많은 영향을 줬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후 장원서는 기능을 다했고, 이 넓은 땅은 조선말 명문거족들에게 넘어갔다. 그중에 젊은 개화파들이 모여 살며 새로운 세상을 도모하려 했던 곳이 바로 이곳 북촌 일대이다. 이른바 ‘3일천하’의 주역 홍영식은 화동 고갯길 아래 옛 창덕여고(현 헌법재판소), 서광범은 덕성여고와 풍문여고 사이, 박영효는 인사동 경인미술관, 서재필과 김옥균은 장원서(경기고, 정독도서관) 터 등 모두 이 동네에 함께 살았다. 이들이 정변에 실패한 뒤 외국으로 망명하자 조선 정부는 화동의 김옥균과 서재필의 집을 몰수한 뒤 관립중학교(경기중)를 세운다.

정독도서관에서 나오면 왼쪽으로 자동차 한 대가 다닐 정도의 작은 고개가 있었다. 이 고개는 창문여고(헌법재판소)로 향하는 고갯길이다. 이 작은 고개는 1998년 전후에 2차선 지금의 도로로 확장되었는데, 사람이 다니기 힘든 자동차 중심의 도로가 되었다. 이후 외지 자본들이 넘쳐나면서, 옛 고개의 정취를 잃어버렸고, 주말은 물론이고 평일에도 자동차와 관광객으로 붐비는 상업 지역이 되었다. 겨울이면 눈길에 위험하고, 원주민들은 카페나 갤러리의 상업자본과 투기자본에 밀려나고 말았다. 그런데 요즘 이 고갯길 때문에 말들이 많다. 불편을 느낀 주민들은 고개 정상부를 조금 깎자고 하고, 자신의 집 공사를 할 때까지 못 깎는다고 하는 사람은 주변 사람을 모아 반대를 한다. 한 문화계 인사는 서울에서 가장 아름다운 고개라면서 억지 주장을 하고, 이를 본 박원순 시장은 한 수 더 거들었다. 필자 역시 길을 깎는 데 신중론자이다.

그렇다면 박 시장은 참여연대 시절, 고갯길이 넓혀질 때 무엇을 했는가? 또 조한혜정 교수는 종친부의 옛 담장과 북촌의 한옥이 사라지고, 상업자본이 난무할 때 무엇을 했는가?

하나 더 이야기하자. 경복궁 옆의 종친부는 왕실의 족보·초상화를 관리하며 종묘사직 제례를 관장하던 조선의 정체성이었으며, 궁궐 다음으로 중요한 곳이다. 일제도 조선의 관청을 대부분 없앴지만 종친부만은 그냥 두었다. 다만 앞마당에 병원이 들어섰다.

군사정권은 이곳에 보안사를 두었다가 기무사로 변했다. 1982년 전두환은 테니스장을 만들기 위해 종친부의 핵심 건물인 경근당과 옥첩당을 정독도서관으로 옮겨버렸다.

이후 문화재계에서는 종친부 복원을 위해 만방의 노력을 했으나, 이명박 정권은 공론화 과정도 없이 일방적으로 역사적인 종친부 자리에 국립현대미술관 분관을 지으라고 지시했다.

수백, 수천억을 퍼부어 과천으로 가더니, 관람객 없다고 역사적인 자리에 수천억을 또 퍼붓는 공사다. 세계 유수의 미술관은 역사적·문화적으로 중요한 자리를 뭉개고 지어지지 않는다. 이러한 역사적인 자리에 미술관이 오는 것은 일제가 궁궐을 훼손하고 박람회장을 만든 것이나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당시 힘없는 문화재계는 강제 이전된 종친부의 경근당과 옥첩당, 과거 종친부의 역사성을 알 수 있는 담장 중 일부만이라도 그대로 복원하겠다는 미술관의 약속을 믿고 기다렸으나, 이제는 그 담장마저 열린 미술관을 지향하는 데 방해가 된다며 온갖 억지를 부리며, 주변 상업자본가들과 종친부는 가치가 없다고 하는 사람들을 동원하여 자기 이익 챙기기에 바쁘다. 급기야 숯불갈비집 인테리어 담장처럼 1~1.5m의 규모로 몇 군데 쌓으라고 하는데 이러한 몰역사성을 가진 자들이 미술을 한다고 한다. 우리는 이런 야만의 시절에 살고 있다.

황평우 한국문화유산정책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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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살. 1988년 5월 종로 가판대에서 친구와 <한겨레> 창간호를 떨리는 손으로 샀습니다. 내 기억으로는 4면에 그야말로 ‘초라’했지만 친구와 나는 무척 기뻐했지요. 우리는 미래에 이 세상에 없겠지만 한겨레는 영원할 것입니다. sunnyfriend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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