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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3.07.11 19:04 수정 : 2013.07.11 19:04

지난달 한국일보 사쪽의 일방적인 폐쇄 조처 이후 25일 만에 편집국이 다시 열리자 9일 오후 기자들이 서울 중구 남대문로2가 한진빌딩 15층 편집국으로 들어오고 있다. 편집국 재개방은 한국일보 노조 비대위가 낸 ‘편집국 폐쇄 해제 가처분 신청’을 법원이 받아들인 데 따른 것이다. 그러나 사쪽은 돌아온 기자들을 배제한 채, 여전히 소수의 인원으로 별도의 편집실에서 <연합뉴스> 기사로 가득 찬 신문을 계속 만들고 있어 ‘법원 결정 위반’ 논란이 거세다. 이정아 기자 leej@hani.co.kr

‘지붕 새고 그대 좁게/ 좁게 접어둔 시름의/ 무릎을 적시는/ 장마비 내린다… (중략)’ 이 글의 서두를 잡기 위해, 1980년, 그러니까 내가 시단에 갓 데뷔하고 <한국일보>에 발표했던 이 변변찮은 시를 찾느라 인터넷을 네 시간 넘게 뒤졌다. 시 얘기를 하자는 것이 아니다. 15층 편집국 입구에 다닥다닥 붙어 있던, 너무나 작은 대자보 분위기는 ‘민주주의여 만세’라고 쓸 만한 것이었으나 그렇게 썼던 시인은 지금 없고, 시대가 결코 그 시대일 수 없고, 다만 시인으로 산다는 게 그때보다 더 참담해졌다는 이야기는 할 수 있겠다.

장마 얘기를 하자는 것도 아니다. 편집국에서 쫓겨나 거의 노상에서 장마를 맞은 한국일보 기자들은 초라하지 않았고, 오히려 당당했고, 난감하기는 편집국 문이 열린 지금이 더 할 것이다. 기자들에게 신문을 만들지 못하는 편집국이란, 공동화한 아파트보다 더 괴기스럽고 난해할 터. 내가 이 시를 찾아낸 이유는 그때 내가 누렸던 시인으로서 자존을 느끼는 감동의 그 후를 정리하면서 한국일보, 무엇보다 한국일보 기자들을, 단지 격려할 뿐 아니라, 예찬하기 위해서다. 그들을 이렇게 대접한다는 것이 얼마나 우리 모두를, 정치인은 물론이고 가해 당사자까지 포함하여, 서글프게 만드는 일인가를 나는 무엇보다 강조하고 싶다.

그때 내게 치기가 없었을 리 없고, 가장 유력한 일간지로서 1면에 신작시를 청탁해서 싣는 한국일보의 문화 중시 정책도 근본적인 것이 아니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내가, 이제 와서, 눈여겨보고 싶은 것은, 한국일보가 이른바 영향력을 서서히 잃게 되면서부터다. 한국에 민주화운동 거셌고, 당연히, 투쟁 경력 혁혁한 신문 많았고, 많다. 그러나 투쟁만으로는, 의롭지 않았던 과거가 부서질 뿐, 미래가 저절로 이룩되는 것은 아니다. 투쟁하는 자야말로 생산해야 하고, 필경 죽을 것을 알고도 삶을 꾸려가는 것이 인간이므로, 우리가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것의 반 이상은, 아니 대부분은(사실 반 이상이 바로 대부분이다) 우리가 지레 포기한 것의 다른 이름이다.

야당·여당은 물론이고 정파와도 무관한, 객관적인 사실 보도 위주의 정론지가 자리잡는 일이 우리나라만큼 힘든 곳도 없고, 중도가 어떤 정치 노선이 아니라, 역사 속 인간과 자연의 합동으로 이룩된 결과로서 합리, 혹은 멀쩡함의 알갱이라는 것을 깨닫는 일이 우리나라만큼 어려운 곳도 없다. 에스엔에스(SNS) 발달로 통신은 비약적으로 늘었으나 정론과 멀쩡함의 입지는 오히려 줄어들었다. 그렇다. 출판의 입지가, 종이신문의 입지가 줄어들었다. 무엇보다 한국일보의 입지가 줄어들었다. 하지만 거꾸로, 나는 그것을 한국일보의 기적이라고 부르겠다. 그때 그 ‘시 한 편’을 ‘삶의 질’, 줄여서 ‘언론의 질’, 더 줄여서 ‘논의의 질’, 더 키워서 ‘전망의 질’이라는 말로, 다만 상징적으로라도 바꿀 수 있다면, 그것은 궁극적인 언론의, 치우치지 않은 평화의 여유가 벌써 마련한 기름진 문화의 씨앗이고 예견일 수 있다.

한국일보는 위축되었지만, 특히 한국일보 기자들은 언론의 멀쩡함이고 지속가능한 발전이고, 미래다. 멀쩡함에 대한 폭력이 멀쩡함의 미래에 대한, 희망보다 더 근본적인 믿음을 파괴한다. 그것이 반 이상 파괴될 때 절망적으로 벌어지는 일을 우리는 혁명이라고 부른다. 악랄이 더한 악랄을 부른다고 우리가 절망하지 않는다. 게으름이 더한 게으름을 부른다고 우리가 절망하지 않는다. 오로지, 모종의 중심과 상식이 속절없이 허물어질 때 우리는 절망한다. 절망의 혁명이 좀체 성공할 수 없는 까닭이고, 그럼에도 벌어질 수밖에 없는 까닭이다.

한국일보 기자들을 저렇게 대접하는 것은 정말 시인으로 사는 일보다 더 참담하다. 사태라고 썼나, 내가? 바라본다고 썼나, 내가? 나는 지금 덜덜 떨고 있다, 화나서가 아니라 두려운데, 무엇이 두려운지도 모르는 채. 1980년의 그 시 ‘장마비’는 이렇게 이어진다. 역시 변변찮게…. ‘나의 가난 속에서 환하게 빛나는/ 그대의 초라함/ 속옷까지 젖어드는/ 발가락까지 마구 뒤집어쓸 사랑의 습기// 아아 그대의 은밀한 내장 속 순결한/ 아픔의 홍수여/ 안타까움 새는 조인 가슴으로/ 흥건히. 흥건히/ 장마비 내린다// 남은 것은 사랑할/ 헐벗은 몸뿐/ 헐벗은 사랑뿐/ 그대는 환히 빛나고/ 장마비 내린다’

김정환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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