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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냐면] ‘로열 베이비’보다 ‘방화자들’ / 이태숙 |
윌리엄 영국 왕세손의 득남 소식이 한국의 신문과 방송에 풍성하게 펼쳐졌다. ‘여러분의 소중한 수신료로 제작되는’ <한국방송>(KBS) 뉴스 화면에 ‘로열 베이비’를 안은 윌리엄 왕세손 부부 모습이 번번이 등장했고, 신문들은 왕세손 부부의 공식 직함과 ‘조지’로 시작되는 네 이름으로 구성된 아기의 공식 이름도 친절히 알려주었다.
이런 한국 언론의 현상을 보며 빅토리아 여왕 때 언론인이자 저술가인 월터 배젓의 말이 생각났다. ‘왕 가족은 멋지고 사랑스러운 사건들로 양념을 쳐서 정치를 달콤하게 만든다’는 그의 논평이 150년이 지난 지금도 영국은 물론이고 한국에서도 참말이구나 싶어서다. 그러고는 영국 왕실의 매력과 마력이 특히 하층민에서 효과적이라는 그의 분석도 현재 한국에서 적실성이 있는지 잠시 궁금했다. 그러나 ‘연극적 요소들’과 ‘막연한 꿈’에 매료되는 하층민들이 왕실에 열광하는 사이 당시 내각책임제가 호도되고 위장된 채 안정적으로 작동한다는 그의 주장은 21세기 대한민국에서는 적용될 수 없는 얘기다.
그렇지만 한국 언론의 ‘로열 베이비’ 보도 행태를 보았을 때 배젓이 지적한 ‘호도’가 작동중이라는 사실은 쉽게 인정된다. 현재 상황을 국가적 위기로 규정하는 대학가·학계·종교계의 잇따른 시국선언과 국정원의 정치개입을 규탄하는 촛불집회는 언론에 거의 보도되지 않으니 언론에 표현된 한국인들은 영국의 ‘로열 베이비’를 자기 나라 국가기반보다도, 그리하여 자신의 권익보다도 중시한다는 꼴이 되었으니 말이다.
국가정보원과 서울지방경찰청이라는 막중한 국가기관 책임자들이 지난해 대통령 선거에 개입한 혐의로 기소된 위기상황에서 한국의 언론과 국민이 영국에 관심을 두려면 ‘로열 베이비’가 아니라 ‘방화자’ 고발 전통이어야 할 것이다. 영국에서 ‘방화자’ 고발 전통은 지금부터 400년 전에 권력자의 탐욕과 횡포를 ‘달걀 익히려 남의 집에 불지르는’ 방화자에 비유했던 프랜시스 베이컨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리고 200년 뒤 19세기 초에 그 전통의 대표적 계승자는 공리주의 철학자 제러미 벤담이었다. 벤담은 나폴레옹전쟁에서 승리하여 권위를 인정받을 만했던 당시 지배자들을 베이컨이 묘사했던 ‘방화자’들이라고 고발했다. 군대를 동원한 전제정치가 자행되는 가운데 그들의 달걀을 충당하느라 나라가 계속 불타고 있다는 것이다.
베이컨과 벤담이 대변한 ‘방화자’ 고발 전통은 영국이 세금 내는 귀족과 무보수로 봉직하는 의회의원과 치안판사제도를 지녔다는 점을 상기하면 그 엄격함이 더 실감난다. 게다가 벤담 시대에는 대표성이 확대된 의회와 인신보호법과 배심원제가 갖추어져 있었지만 그는 왕과 고위관리들이 ‘부패대장과 졸개들’이며 법관들은 ‘사나운 검정개’라고 일갈했다.(비판자들을 걸핏하면 ‘막말’했다며 몰아붙이는 새누리당 인사들과 시사 논평자들은 200년 전 이런 말에는 까무러칠까?) 영국의 전통 엘리트가 책임 있는 지배층이라고 칭송받게 된 배경에는 이렇게 몇백년에 걸쳐 전개된 통치자들에 대한 치열한 저항 전통이 있었다.
이런 배경 탓인지 100년 전에 우리나라를 방문했던 영국인들은 조선 말기의 관리와 양반계층을 ‘수치심조차 없이 백성의 고혈을 빠는 진드기’라거나 ‘흡혈귀’ ‘기생충’ 등 온갖 혐오스러운 것들에 비유했다.(의심할 바 없이 까무러칠 ‘막말’이다.) 우리는 이들의 ‘제국주의적 시각’을 문제 삼으면서도 한편으로 영국에 비하여 한심했던 이 땅의 지배층 수준을 뼈아프게 인정하게 된다. 망국과 식민통치와 독재의 고통이 그 증거이기 때문이다.
21세기에 우리는 또다시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정보기관을 동원하고 국가기밀을 유출·왜곡·공개하여 국민의 기본권리와 이익을 짓밟는 권력자들의 행태를 눈앞에 보고 있다. 영국인들이 몇백년을 두고 고발해온 ‘달걀 익히려 남의 집에 불지르는’ ‘방화자’ 행태가 자행되고 있는 것이다. 권력집단의 전횡에 대항하여 피지배층이 치열하게 저항하고 규제해야 비로소 피지배층의 권익이 확보된다는 영국 역사의 교훈을 상기하고 실천할 때가 바로 지금인 듯싶다.
이태숙 경희대 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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