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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냐면] 비무장지대에 이산가족을 위한 집을 짓자 / 송진영 |
베를린에 있는 포츠다머 플라츠라는 곳은 예전에는 전쟁과 분단에 의해 버려지다시피 한 곳이었지만 장벽이 허물어진 이후 통일 독일을 상징하는 가장 번화한 거리 중 하나가 되었다. 이곳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피터 아이젠먼이 디자인한 홀로코스트 메모리얼이 있다. 유대인 학살에 대한 직접적인 경험이나 기억이 없는 나와 같은 아시아의 한 관광객도 이곳을 걷다 보면 마음이 숙연해지고 독일 사회가 과거를 대하고 기억하려는 노력에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미국 워싱턴디시의 내셔널 몰을 걷다 보면 베트남 참전용사 기념비 그리고 한국전쟁 참전용사 기념비가 있는데 여기에 새겨진 이름들과 아름다운 문구들을 읽다 보면 복잡한 정치적 해석과 역사 공부 이전에 경건한 마음을 가지게 된다. 이렇듯 공공예술로서의 메모리얼 디자인은 ‘역사’ 이전에 ‘기억’에 호소하며 과거에 초점을 맞추기보다는 예술적 경험을 하는 현재의 사람들, 그리고 그 사람들이 반응하고 만들어가는 미래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역사는 과거에 머물러 있지만 기억은 끊임없이 변화하는 주체로서 미래를 간섭하고 우리의 삶을 제약하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가 과거를 대하는 방식은 극단적으로 다른 두 가지 모습인데, 하나는 어느 이름 모를 고속도로 휴게소에 있는 한국전쟁 기념비들이나 용산 전쟁기념관에 있는 건조한 역사의 파편들처럼 우리의 실제 삶과 동떨어진 모습이고, 다른 하나는 보수와 진보로 첨예하게 대립하며 증오와 원망을 이어가고 있는 과잉된 역사인식의 모습이다. 역사는 하나인데 기억은 아예 없거나 아니면 서로 다른 두 개의 기억이 싸우고 있는 것이다. 예술에 목적이나 역할이 있다면 그것은 기억상실증에 걸린 사람에게 질문을 던지거나 첨예하게 대립된 미움과 증오를 보듬고 서로 다른 기억의 간극을 줄이는 것이다. 아픔의 기억을 오히려 미래를 향한 우리의 에너지로 바꾸는 진정한 예술 작업이 절실하다.
비무장지대는 참혹했던 비극의 역사가 우리에게 남겨놓은 유품 같은 것이다. 이 고귀한 유품에 손을 대려면 치열한 토론과 고민이 필요한데 이것은 우리가 지나간 역사에 대한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미래를 만들어 가는 기억에 대한 작업이기 때문이다. 비무장지대의 다른 쪽 당사자는 아무런 관심이 없는 한쪽의 개발과 이익 추구는 평화와도 관계없고 생태와도 소원하다. 그러면 무엇이 우리에게 비무장지대에 손을 대고 개발할 수 있는 정당성을 주는 것일까? 그동안 남과 북, 어떤 정치세력도 평화와 화해를 향한 에너지를 모으지 못한 채 갑자기 어떤 목적으로, 어떤 자격으로 평화 운운하며 그 유품을 헤집을 수 있을까?
나는 전쟁이 우리에게 남겨준 슬프지만 고귀하고 아름다운 또다른 유품이 이산가족임을 상기시키고 싶다. 만약 그들을 향한 위로와 배려의 목적이라면 그 땅에 발 디딜 수 있다고 생각한다. 메모리얼 디자인의 핵심이 그 무엇을 매개해서 과거를 기억하고 미래를 만들어가도록 하는 데에 있기 때문에 우리에게 남겨진 두 유품을 아름답게 기억하는 방법으로서 비무장지대에 이산가족을 위한 집을 짓는 것을 제안한다. 그 장소를 동시에 메모리얼로 조성해서 그들의 만남에 우리 모두가 증인이 된다면, 남쪽도 북쪽도 아닌 아름다운 땅에서 마주하는 그들의 재회, 다시 살아감은 우리 가슴 깊은 곳에 미래를 향한 어떤 행동을 호소할 것이다.
반세기를 헤어진 형제, 자매, 부모 자식들에게 그들이 원하는 만큼, 얼마 남지 않은 그들의 삶 동안 만나서 밥을 지어 먹고 잠을 자고 서로를 위로할 수 있도록 해준다면, 그 모습을 아름다운 땅, 건축물, 메모리얼과 함께 경험할 수 있다면, 그 기억은 미래를 향해 잠잠히 쌓이고 쌓이는, 우리의 무의식 속에 기억으로 축적되는 평화와 통일을 향한 건강한 에너지가 될 것이다.
송진영 버펄로 뉴욕주립대 건축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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