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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3.10.21 18:50 수정 : 2013.10.21 18:50

어릴 적 고향집에는 아버지가 만든 꽃밭이 있었다. 유독 장미가 많아 호사스럽게도 ‘장미집 딸’이라는 말을 듣기도 했다. 1950년대 살벌할 정도로 먹는 것이 중요했던 그때, 아버지는 꽃을 먹는 일 다음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지금도 귀하게 지키고 싶은 유산으로 생각하고 있다.

그런 유산 덕분인지 어느 모임에서 꽃을 받으면 그 꽃을 소중하게 집 식탁 위로 모셔 단 한송이가 남을 때까지 물을 갈고 시든 꽃을 정리한다. 내내 행복하다. 꽃이 내 공간에 함께하는 시간에 나는 놀고 있어도 무엇인가 창조적인 일을 하고 있는 것 같은 생각을 한다. 실제로 꽃과 함께하는 일상 속에서는 그 존재 자체가 나의 시이고 나의 노래이며 나의 꿈이 되기 때문이다. 꽃은 꽃을 피우는 동안, 그리고 꽃이 피어 있는 시간 내내 너무나 열심히 살고 있는 것이 보인다. 순전히 꽃을 바라보는 사람을 위하여 말이다. 꽃은 시들어서 나쁘다는 사람을 만난다. 그렇다면 인간은 반드시 죽으니까 살지 않는다는 말인가. 짧은 시간이지만 향기와 색채와 각기 다른 모습들을 보노라면 왜 생명이 눈부신가를 깨닫게 된다.

1950년대 우리 집에는 먹을 음식은 있었지만 사랑이 없었다. 아버지는 늘 탈출을 꿈꾸었고 어머니는 그 탈출을 막으려고 거친 목소리가 떠나지 않았다. 솜털 공장처럼 시끄러웠다. 어머니는 집착이 강한 분인데 아버지를 혼자 가지려고 안간힘을 썼다. 이 세상에 아무것도 혼자 가질 수 없다는 것을 알고 그 무시무시한 집착을 내려놓았을 때 어머니는 눈을 감으셨다. 참 지겹게도 부부싸움을 하시던 어머니도 꽃밭에 계실 때는 환하고 아름다웠다. 때론 한참을 꽃 앞에 계셨는데 아마도 그 시간이 집착을 내려놓으려고 노력하는 시간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집착으로 자식의 교육에는 남달랐으니 다 나쁜 것은 아니었나 보다. 그러나 우리 가족은 늘 불안했고 말이 없었고 가족들 얼굴을 바라보기보다 벽을 바라보는 일이 더 잦았다.

우리 집에는 ‘아버지방’이라는 곳이 있었는데 책이 몇권 있는, 이름하여 서재였다. 아버지가 안 계시는 날은 그 방이 내 방이었다. 그 방에서 아버지가 식물 백과사전을 보신다는 것을 알았다. “세상에 꽃이 있다면 인생의 절반의 행복은 이미 받은 것이다”라는 말을 자주 하신 것과 통한 것이리라. 그러나 꽃 속에서 딸들은 모두 얼굴이 어두웠다. 그 어두운 얼굴의 가족 앞에 꽃이 무슨 구실을 했었는지를 그때는 전혀 몰랐다.

그랬을 것이다. 봄에는 진달래와 개나리가, 여름에는 아침을 여는 나팔꽃이 있었다. 채송화와 수국과 장독대 옆에 붉게 타오르는 파초와 여러가지 빛깔의 고혹적인 장미와 가을에는 국화가 있었다. 그 꽃들 때문에 우리 가족이 정신이 돌지 않고 제대로 살아왔다고 나는 늘 생각한다.

아마도 모든 가족들이 자기를 견딜 수 없을 때 꽃들과 대화를 하지 않았을까. 그 대화 속에서 은근슬쩍 웃기라도 하지 않았을까. 중학교 시절, 사춘기 시절이었다. 무조건 아버지 어머니 언니들도 다 보기 싫어서 늦게 집에 들어와 어머니에게 매를 맞았을 때 나는 꽃밭에서 혼자 울곤 했다. 울었지만 이상하게 많이 슬프지 않았다.

덜 슬프고 덜 미워하고, 그러나 꿈만은 더 강하게 키웠던 이유는 꽃들과의 말 없는 대화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 슬퍼하지 않았던 반절의 감정이 나를 시인으로 만들었을 것이다. 나의 눈물을 지켜봐준 꽃들의 혼을 가슴에 품고 나는 성장했을 것이다.

나는 내 집으로 들어오는 문 앞에 늘 꽃을 놓아둔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흘깃 향기를 맡게 르네브를 놓거나 백합을 놓거나 때로는 자욱하게 안개꽃을 놓기도 한다.

나 혼자가 아니라 아파트를 오가는 사람들이 함께 그 꽃을 감상하므로 나는 꽃값이 아깝지 않다. 그들은 순간에 소설 하나, 시 한수를 읽고 가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것이 문화가 아니겠는가.

문화라는 말이 익숙해진 지는 꽤 오래되었다. 그러나 문화적으로 살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정확하게 나는 꽃이 문화라는 것만은 안다. 무엇인가 만들고 싶은 창조적인 행복을 가져다주는 문화 말이다.

신달자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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