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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3.10.21 18:50 수정 : 2013.10.21 18:50

올해는 홍범도 장군이 이역만리 카자흐스탄에서 순국하신 지 70주기 되는 해입니다. 그분의 위대한 무장독립투쟁의 발자취와 말년의 쓸쓸하고 허무한 삶에 대하여 회고하고자 합니다.

1943년 10월27일치 알마티에서 발행된 <레닌 기치>에는 이런 기사가 실렸습니다. “홍범도 동무가 여러달 동안 병상에 계시다가 본월 25일 하오 8시에 별세하였기에 그의 친우들에게 부고함. 장례식은 1943년 10월27일 하오 4시에 거행함. 부고자: 크질오르다 정미공장 일꾼 일동.” 이 기사가 우리 독립운동사에서 길이 남아야 하는 무장투쟁 영웅의 마지막을 알리는 소식이었습니다.

나는 홍범도 장군의 비범한 삶과 뛰어난 전쟁 지휘 능력에 대하여 이미 여러번 소개했습니다. 첫째, 홍범도 장군은 양반계급도 아니고 비천한 광부였고, 입에 풀칠을 하기 위해 절을 찾아간 식객승이었고, 포수로서 생활을 이어간 하층계급이었습니다. 그는 조선왕조로부터 아무런 혜택도 받지 못했고 오히려 착취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조국이 외세에 의하여 침탈당할 때 분연히 일어나 민족의 독립을 위하여 헌신했습니다.

1907년 대한제국의 군대가 일제로부터 강제로 해산되자 군에 소속된 장병들은 궐기하여 즉시 의병투쟁을 전개하였습니다. 의병투쟁은 후에 만주나 극동 러시아 지역에서 독립군으로 발전하였습니다. 독립군은 국경 지대에서 전투태세를 준비하였으며 언젠가는 국내에 진공하여 다시 나라를 찾겠다는 의욕에 불탔습니다. 홍범도 장군은 이때 독립군의 지휘관으로 맹활약했습니다.

둘째, 홍범도 장군은 항상 자기를 낮추었습니다. 의병투쟁은 각 지역에서 자연발생적으로 일어났습니다. 자연 통일된 지휘체계도 없고, 어떤 명령을 하달할 수 있는 위임된 사령부도 없었습니다. 의병이나 독립군은 서로 자신들 위주로 사람을 모아 부대를 편성했습니다. 이로 인해 상호 간 주도권 다툼이 일어나고, 이기적인 종파의식이 생긴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홍범도 장군은 비범한 인격과 지휘력을 갖추었습니다. 그는 항일투쟁 전선을 앞에 두고 서로 작은 이해로 싸워 전투력이 약화되고 있음을 안타깝게 생각하여 스스로 연합한 부대의 사령관 자리를 피하고, 오히려 그 휘하의 연대장으로서 임무를 맡아 부대를 지휘하였습니다.

셋째, 홍범도 장군은 뛰어난 전술 능력을 갖추었습니다. 1920년 중국 길림성 화룡현 봉오동전투에서 열세한 독립군 연합 부대가 일본군 정규 사단의 병력과 대적하여 승리를 쟁취하기란 쉽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홍범도 장군은 뛰어난 부대 지휘 능력과 기발한 전술작전 운영으로 열세를 극복했습니다. 적군을 봉오동 골짜기로 유인하여 완전히 퇴로가 차단될 때까지 기다렸다가 일시에 적을 섬멸하는 그의 탁월한 전술 지휘는 분명히 우리에게 많은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봉오동 전승이 있었기에 후에 청산리에서 재차 일본군 대부대를 섬멸할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승리의 역사를 배우면서 소년 시절 우리는 ‘나는 홍범도’의 전설 같은 이야기를 많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그분이 냉혹한 국제정치 놀음에 배신당하고 한 많은 삶을 살았다는 마지막 부분에 대하여 우리는 알지 못했습니다.

1920년 두번이나 패전한 일제는 정규군을 대대적으로 동원하여 만주 지역 독립군 진압작전을 전개하였습니다. 1921년 6월 홍범도 장군은 후퇴하면서 휘하 병력 약 300명을 이끌고 이르쿠츠크 소련군 제5군단 합동민족여단 대위로 편입되었습니다. 이는 막다른 길에서 독립군을 살려야 하는 부득이한 선택이었습니다. 홍범도 장군은 1921년 말 모스크바에서 열린 ‘제1차 동방근로자대회’에 초청을 받기도 하였습니다. 레닌으로부터 권총 1자루와 금화 100루블을 선물로 받았으며 이후 얼마 되지 않아 25군단 ‘조선인 여단 독립대대’ 지휘관이 되었습니다.

홍범도 장군은 비록 남의 나라 군대에 몸담고 있지만 언젠가는 이 독립대대를 이끌고 국내 진공을 하겠다는 희망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나라 없는 민족의 설움은 여기서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혁명 이후 기반을 확보한 소련군은 노골적으로 고려인 배제 정책을 폈습니다. 1923년, 55살의 홍범도 장군은 강제로 군복을 벗어야 했습니다.

그 후 홍범도 장군은 야인으로서 연해주에서 콜호스(집단농장)를 조직하고 다시 고려인들을 지도하였습니다. 그러나 1930년대 일본의 국력이 점점 강화되면서 만주를 집어삼키고 연해주를 압박하는 형세에 이르렀습니다. 세월은 덧없이 흘러가고 홍범도 장군은 점점 늙어감에 초조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스탈린이 집권한 이후 소련에서 홍범도 장군의 삶은 한층 더 어렵게 되었습니다. 스탈린은 밀려드는 일본을 자극하지 않기 위하여 1937년 연해주의 고려인들을 대대적으로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시켰습니다. 소련 지휘부는 집단 강제이주에 반발하는 고려인 지도급 인사나 군 장교 약 2800명을 숙청했습니다. 69살의 노인 홍범도 장군은 다행히 학살은 면했지만 이미 울안에 갖힌 늙은 호랑이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크질오르다로 이주해 와서 야간에는 고려극장의 수위로 일하고, 주간에는 정미소의 근로자로 외로운 삶을 살았습니다. 그리고 조국의 광복을 앞둔 1943년 한 많은 일생을 마감했습니다.

역사는 힘없는 민족에게는 가혹한 것입니다. 중앙아시아의 디아스포라로 사는 고려인들은 홍범도 장군을 아직도 존경하지만 그분은 왜 시신이나마 조국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크질오르다 묘소에 잠들어 있어야 하는지 그 이유를 잘 모르고 있는 것 같습니다.

25일 우리는 홍범도 장군의 묘소에 헌화·분향하고 그분의 고귀한 삶에 다시 한번 머리 숙여 삼가 추모의 예를 올립니다.

이종찬 사단법인 여천홍범도장군기념사업회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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