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왜냐면] 200여년 만에 되살려낸 다산의 ‘국화 그림자 놀이’ / 이동식 |
국화가 여러 꽃 중에서 특히 뛰어난 점이 네 가지 있다고 한다. 늦가을, 아름다운 자태를 자랑하던 온갖 꽃들이 다 시들고 떨어진 다음에 피는 것이 하나이고, 꽃이 금방 지지 않고 오래도록 견디는 것이 하나이고, 향기로운 것이 하나이고, 고우면서도 화려하지 않고 깨끗하면서도 싸늘하지 않은 것이 하나다. 그러므로 국화야말로 서리 속에서 꼿꼿이 사는 높은 절개를 자랑하는 선비의 덕 그대로다.
이렇게 빼어난 국화를 촛불의 그림자를 통해 감상하는 아름다움을 발견한 이는 다산 정약용이다. 친한 친구들을 초대해 한밤에 국화꽃 쇼를 즐긴 그이다. 옷걸이·책상 같은 모든 산만하고 들쭉날쭉한 물건을 치우고, 국화의 위치를 정돈해 벽에서 약간 떨어지게 한 다음, 적당한 곳에 촛불을 두어 국화를 비춘다. 그랬더니 기이한 무늬, 이상한 형태가 홀연히 벽에 가득하다. 그중에 가까운 것은 꽃과 잎이 서로 어울리고 가지와 곁가지가 정연하여 마치 묵화를 펼쳐놓은 것과 같고, 그다음엔 너울너울하고 어른어른하며 춤을 추듯이 하늘거려 마치 달이 동녘에서 떠오를 때 뜨락의 나뭇가지가 서쪽 담장에 걸리는 것과 같다.
고려 때의 천재 시인 이규보는 바퀴가 달린 정자를 개발해 이를 옮겨 가며 아름다운 경치를 감상하고자 했는데, 조선시대에 가장 많은 시를 쓴 시인이기도 한 다산은 이처럼 그림자 꽃놀이로 사람들에게 감탄과 감동을 줬다.
지난 19일 주말 저녁 경기도 양평군 ‘물과 꽃의 정원’ 세미원의 신양수대교 아래에 문인과 묵객, 문화와 예술을 사랑하는 분, 마을 주민 등 200여명이 모였다. 상명대와 우리문화가꾸기회에서 공동 주최한 ‘국화 그림자에 풍류를 실어’라는 행사였다. 바람 끝이 쌀쌀한 가을밤, 신양수대교의 교각을 이용해 걸린 높이 5미터의 흰 광목천, 잠시 뒤 음악이 흐르고 저 뒤에서 빛이 나오기 시작하면서 흰 광목천이 극장의 영사막으로 변해 사람들의 눈과 귀를 집중시켰다. 그리고는 약 한시간, 사람들은 눈을 떼지 못했다. 거기에는 국화의 그림자가 은은한 향기를 뿜고 있다가 바람을 타고 기묘한 자태로 변하며 나의 이런 모습을 보았느냐고 묻는 듯했다.(사진) 국화만이 아니라 매화와 난초, 대나무 등 사군자가 영사막의 앞뒤에서 비치는 빛의 방향과 강도에 따라 짙고 옅은 그림자의 파노라마를 펼친다. 화면에는 이해를 돕고자 현대의 디지털 기법을 통해 붓으로 글씨를 써 내려가는 듯 붓으로 난초를 치며 대나무를 치는 모습이 나타나며 그림과 글씨가 이해를 돕는다. 무대의 앞이나 뒤에서는 예인들이 나와 음악에 맞춰 때로는 춤을 추고 때로는 연극의 주인공이 되어 이야기를 만들어준다. 나라를 잃은 장부의 충절이 담긴 충정공 민영환의 혈죽이 재연되면서 이 그림자 연극은 절정에 이른다. 다산이 개발한 국화 그림자 놀이가 200년 만에 다시 살아나는 현장이다.
이 입체예술은 우리문화가꾸기회와 세미원 연꽃박물관팀이 사료를 발굴하고 상명대 이성호 교수가 재현해냈다. 무대조명 전공인 이 교수는 제자들과 함께 현대적인 조명을 활용해 다산의 국화 그림자를 현대인이 좋아하는 방식으로 복원하여 재창조했다. 날씨가 쌀쌀했지만 사람들은 무대에 눈이 팔리고 음악에 귀가 쏠려 추운 줄도 몰랐다. 한 시간이 넘는 시간이 금방 지나가면서 어느새 짧은 시간을 아쉬워하는 내 모습을 발견하고는 한숨을 쉰다. 아, 이런 멋진 볼거리를 은근한 술 한잔과 함께 볼 수 있으면 얼마나 더 멋진 풍류일 것인가? 그러나 그날 공연은 술 없이도 충분히 취할 수 있었다.
다산이 벼슬을 할 때 살던 서울의 남산골인 명례방에서 우인들과 모여 매화가 필 때, 살구꽃 필 때, 국화가 필 때 꽃의 멋을 흠상하고 시를 짓는 모임을 가지며 그 이름을 ‘죽란시회’라 했는데, 세미원에서 그 풍류를 살려 3년 전부터 ‘죽란시사’란 모임을 시작했다. 세 번째로 진행된 올해의 행사는 다산의 그림자 풍류를 현대적으로 되살려 성공을 거두었다. 중국인들은 가죽이나 종이로 각종 인물을 만들어 긴 막대 위에 올리고 이들의 그림자를 통해 이야기를 보여주는 ‘피영’이란 그림자연극을 개발했지만 그것이 너무 빠르고 요란한 음악에 정신을 못 차릴 정도라면 이번에 개발한 그림자놀이는 풍류와 아취가 있는 고품격이고, 음악도 은근함과 강렬함을 적절히 배합한 다채로운 것이기에 앞으로 이를 잘 보강하면 우리의 전통에서 되살린 새로운 볼거리, 즐길거리로서 우리뿐 아니라 세계인에게도 사랑을 받을 수 있을 것이란 확신은 나에게만 생긴 것이 아닐 것이다. 이날 돌아오는 길 국화꽃 냄새가 유난히 코를 찔렀다.
이동식 백남준문화재단 이사
기사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