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3.10.30 19:20
수정 : 2013.10.30 1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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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레이션 김선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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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밤에 치를 중간시험 문제, 이제야 다 냈습니다. 오후 내내 숨 막힐 정도로 집중해야 했습니다.
공대에서 수학을 가르칠 때는 공식만 적용할 줄 알게 하면 된다고들 했습니다. 이젠 유통기한 지난 이야기입니다. 인터넷에 거의 모든 정보가 있고 그걸 언제 어디서든 쉽게 가져올 수 있는 지금, 공식을 기억하는 수학은 비수학적입니다. 그래서 저는 수학적 (결과가 아니라) 과정에 초점을 맞춥니다. “우리는 수학과 학생이 아니에요!”라고 외치는 일부 학생의 아픔(?)을 뒤로하고 주로 증명 문제를 시험에 내는 것도 바로 이렇게 과정을 중요하게 여기는 교육철학 때문입니다. 답이 맞아도 과정이 바르지 않으면 매정하게 점수를 크게 깎습니다. 반면 잘못된 답이 나와도 과정이 올바르면 감점을 거의 하지 않습니다. 강의시간에도 거듭 강조합니다. “중요한 건 과정이지 결과가 아닙니다. 지식 생산 능력도 과정에 집중해야 기를 수 있습니다.” 이번에도 예외 없이 증명 문제를 많이 냈습니다. 물론 이 사실은 시험을 앞둔 학생들한테 아무런 의미가 없는 정보입니다. 이른바 기출 문제가 다 공개된데다 출제 방식이 늘 똑같기 때문입니다.
학생들을 만나며 이렇게 과정을 강조하는 제가 ‘복종’이니 ‘승복’이니 하는 표현을 불편하게 여기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입니다. 이를테면 2004년 신행정수도건설특별법이 위헌으로 판정됐을 때, 헌법재판소에서 관습헌법을 그 근거로 제시했던 건 충격적인 사건이었습니다. 행정수도 이전에 반대하는 사람이라도 관습헌법을 근거로 들어 특별법이 위헌이라고 말하는 데에는 아마 동의하기 어려웠을 겁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 논리에 문제를 제기했을 때 당시 한나라당이나 주류 신문에선 뭐라고 했을까요? 따지지 말고 그냥 승복하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또 떠오르는 건 천안함 사건입니다. 합동조사단 보고서에 이해가 잘 안되는 부분이 있어 질문 좀 하려 했더니, 묻지 말고 결과를 받아들이라 합니다. 그래도 계속 질문하려 하면 종북이냐며 몰아붙입니다. 과학자들이 내린 결론이니 질문하지 말라 하는 건, 동그란 네모나 네모난 동그라미 같은 이야기입니다. 과학의 핵심은 질문하는 데 있기 때문입니다.
이번엔 대선 결과에 복종하라고 말합니다. 과정의 부당함을 말하는데, 결과에 복종하라고 합니다. 과정의 부당함은 설사 그게 결과를 바꿀 정도의 영향을 주진 않았다 하더라도, 말 그대로 옳지 않은 일입니다. 복종과 승복을 강요하는 폭력적 문화 속에서, 제가 학생들한테 강조하는 것과는 정반대로 결과가 과정에 우선하는 한국의 현실을 거듭 목격하게 됩니다. 학생들은 아마 이 시각에도 시험 준비하느라 다른 생각을 할 틈이 없을 겁니다. 그런 학생들한테 저는 지금 큰 부채감을 느낍니다. 우리 학생들, 시험 열심히 잘 치르길 바랍니다.
복종을 요구하는 건 폭력입니다. 거부합니다. (이 글은 25일 오후 중간시험 문제 내는 일을 막 마치고 나서 쓴 것입니다.)
윤태웅 고려대 전기전자전파공학부 교수
<한겨레>에서 시민사회 토론 공간으로 제공한 지면입니다. 한국 사회 구성원은 누구나 참여할 수 있습니다. 글쓰기의 기본을 갖추고 인신공격을 멀리하며 합리적인 논거를 담은 제의, 주장, 비판, 반론 글을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글과 함께 이름과 직함, 연락번호, 주소를 적어 보내주십시오. 청탁 글이 아니라 자발적 참여로 짜이므로 원고료는 드리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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