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3.11.20 19:22
수정 : 2013.11.21 1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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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레이션 김선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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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한겨레>가 ‘박근혜의 코카시즘’(11월16일치)을 커버스토리로 다룬 바 있다. 코카시즘이란 이른바 한국판 매카시즘을 이르는 말인데, 이 용어는 박정희 정권 시절 박정희 대통령의 좌익 전력을 물고 늘어지는 야당의 사상 공세에 대응하는 과정에서 여당이 만들어낸 것이라고 한다. 이런 것을 두고 역사의 아이러니라고 하던가? 1960년대에 아버지의 ‘빨갱이 누명’을 벗기기 위해 동원됐던 용어가 50년이 지난 오늘날 그 딸이 대통령에 오른 이 시점에 와서 야당을 대상으로 ‘빨갱이 사냥’을 위해 사용되고 있으니 말이다.
오늘날 유권자의 48%는 코카시즘의 서슬 퍼런 칼날 앞에 잔뜩 몸을 움츠리고 있다. (48%를 대표한 야당의 맏형 격인 민주당이 저렇게 몸을 사리고 있는 것을 보라!) 이 ‘칼의 노래’로 이들이 겪는 마음의 고통은 50년 전 박정희가 겪었던 그 고통과 견주어볼 때 양적으로나 질적으로나 결코 가볍지 않다. 지금의 박근혜 정권이 칼자루를 쥐고 있듯이 당시에도 칼자루를 쥐고 있던 쪽은 코너에 몰리던 박정희였다. 이 칼자루가 탈출구를 만들어줄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는 이 칼자루를 휘두름으로써 위기를 모면하지 않았는가! (그는 5·16 쿠데타의 ‘정치적 설계자’요, 대구사범학교 동기이기도 한 당시 <문화방송> 사장 황용주를 반공법 위반 혐의로 구속시키고, 조용수 <민족일보> 사장을 빨갱이로 몰아 사형시켰다.)
매카시즘 내지 코카시즘이 마녀사냥의 칼이 되어 날을 벼르는 이 시점에서, 그로 인해 공포 분위기가 확산되고 갈등이 더욱 심화되고 있는 이 시점에서, 간략하게나마 이 이념의 정체를 짚어봄으로써 먹먹하고 답답한 가슴들을 조금이나마 위로하고픈 심정에서 이 글을 쓴다.
사회심리학의 열쇳말 중에 ‘투사’(Projection)와 ‘희생양 작전’이 있다. 투사란 자신의 내부에 깃들어 있는 약점을 보지 못하거나 또는 보려 하지 않을 뿐 아니라 이 약점을 오히려 상대방에게서 찾으려는 심리적 메커니즘을 이르는 말이며, 희생양 작전은 곤경에 처한 인간이 자신의 주변에서 자신보다 힘이 없는 상대, 곧 희생양을 물색하여 이 상대를 적으로 삼는다는 것이다.
이 투사와 희생양 작전을 가장 명쾌하게 설명해주는 실례를 우리는 제3제국의 독재자 히틀러의 유대인 학살에서 찾아볼 수 있다. 홀로코스트, 600만명이라는 엄청난 수의 유대인 학살, 이 학살을 주도한 히틀러는 어린 시절 주위 친구들로부터 자신이 유대인을 닮았다는 얘기를 많이 들었다고 한다. 히틀러의 이러한 집단살인 교사행위의 근인을 사회심리학자 고든 올포트는 심리적 불안에서 찾는다. “히틀러는 본질적으로 자신을 유대인과 동일시했다. 때문에 그는 유대인에게 형벌을 가함으로써 자신을 향한 탄핵의 손길을 피하고자 했다.”
심리적 불안, 그러니까 저 매카시즘의 본질 속에는 심리적 불안이 작동하고 있는 것이다. 히틀러는 전쟁 비용으로 나라 경제가 파탄 지경에 이르러 국민의 원성이 높아지자 이 위기 국면을 벗어나기 위해 유대인을 희생양으로 삼았다. 돈밖에 모르는 유대인들이 나라의 돈을 모두 긁어 갔기 때문에 국가 경제가 이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는 유언비어를 사실로 둔갑시킴으로써 국민들이 자신을 향해 겨눈 손가락의 방향을 유대인 쪽으로 돌리게 한 것이다.
아도르노의 용어를 빌리면 히틀러는 ‘자아나약성’에 빠진 사람이다. 자아나약성에 빠진 인간은 곤경에 처하면 자신의 내부에 은폐된 약점을 적대시하게 된다. 바로 이 약점 때문에 자신이 불행해진다고 믿기 때문이다. 여기서 그는 자기 내부에 도사리고 있는 이 적을 퇴치하는 대신 더 힘없는 적을 날조해낸다. 다시 말해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는 대신 이 잘못을 남의 탓으로 돌리는 것이다. 호르크하이머는 이런 경우를 두고 다음과 같이 말한다. 자아나약성에 빠진 사람들은 “자신의 주장이 잘못되었음을 눈치채면 챌수록 더욱더 그 주장에 열광적으로 매달린다. 경직된 편견은 광신주의로 빠져들게 마련이다.” 올포트의 말대로 반유대주의자(히틀러)는 유대인이 없었다면 유대인을 만들어냈을 것이다.
오늘 우리의 정치환경은 히틀러의 이 제3제국을 떠올리게 한다. 나치 정권이 경제 파탄의 원인을 유대인에게 전가했듯 오늘의 우리 박근혜 정권은 국가정보원의 대선개입으로 정권의 정통성이 흔들리자 이석기, 채동욱, 윤석열 그리고 전교조라는 희생양을 코카시즘의 제단에 올리고 있다. 희생양이란 무엇인가? 그 옛날 야만의 시대에, 인간의 운명을 전적으로 하늘(신)의 뜻에 맡기던 그 시절에 재앙을 미연에 방지하고 행복한 내일을 맞이하기 위해 신의 제단에 제물로 바친 양을 이르는 말이다. 그런데 지금 21세기 대명천지에 박근혜 정권은 양이 아닌 인간을, 그것도 우리의 내일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들만의 천국을 위해서, 나와 같은 피를 나누고 나와 같은 땅에서 나와 함께 숨쉬는 내 동포를 희생시키고 있다. 야만보다 더 끔찍한 야만, 이 야만이 야만의 늪을 헤어나 문명의 길로 들어서는 날은 언제일까. 하지만 나는 오늘부터 내가 존경하는 구아무개 선생의 희망 어린 말 사필귀정, 모든 잘잘못은 반드시 바른길로 돌아온다는 말을 믿기로 했다.
임호일 동국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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