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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3.12.04 19:30 수정 : 2013.12.04 19:30

일러스트레이션 김선웅

인기 미국 드라마 <웨스트 윙>에는 필리버스터(합법적 의사진행방해)와 관련한 에피소드가 나온다. 여당이 내놓은 가족복지법안에 반대하기 위해 야당 의원이 요리책을 가지고 나와 레시피를 하나둘씩 읊는 장면이다. 몇 가지 규칙이 있다. ‘의장석에서 계속 발언을 해야 하고, 발언이 중단되어서는 안 된다. 화장실에도 갈 수 없다. 다만 어떠한 내용이든 읊어도 상관없다.’ 합의의 의사를 도출하기 위해 말도 안 되는 상황을 허용하는 것이 내게는 깊은 인상을 남겼다.

국회의 의결은 합의에 의해 최우선적으로 이루어지고, 합의로 의견이 도출되지 못할 경우에 표결을 한다. 하지만 의사 결정이 거칠게 도출될 경우 발생할 여야의 정치적 부담감, 국민의 신뢰 상실 등을 고려해 날치기가 아닌 합의로 의사를 결정하기 위한 장치가 바로 필리버스터 제도이다.

지난주 황찬현 감사원장 후보자 임명동의안은 여당의 강행 처리에 의해 통과되었다. 민주당 의원 127명이 ‘무제한 토론 실시’를 요구했지만 국회의장에 의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새누리당 서병수 인사청문특별위원회 위원장이 종편 채널 9시 뉴스에 나와 ‘인사청문회 안건은 무제한 토론 실시 안건에 포함될 수 없고, 민주당의 무제한 토론 실시 요구는 발목 잡기’라고 비난했다. 민주당은 이에 대응해 모든 의사 일정을 거부하고 있다.

여야가 2012년 합의한 국회선진화법에 의해 도입된 필리버스터 제도가 이렇게 무참하게 좌절되었다. 정작 법을 만들어놓고도 불리해서 지키지 않는다면 어느 국민이 법을 지키려 하겠는가. 정말 당황스러운 것은 “인사청문회 안건은 무제한 토론 실시 안건에 포함될 수 없는 안건이라는 ‘국회사무처의 유권해석’이 있었기 때문에 필리버스터를 실시할 수 없었다”는 여당 일각의 주장이다. 민주주의의 심각한 위기다. 국회법의 운용을 해석하고 결정하는 것은 국회의원이지, 국회의원을 보좌하기 위해 존재하는 국회사무처이겠는가. 국회의원 스스로 ‘나는 국가의 심각한 의제를 결정할 자신이 없소’라고 말한 꼴밖에 더 되겠는가.

미디어법의 전례에 따라 야당이 헌법재판소에 권한쟁의심판이나 가처분을 제기할 수도 있다. 하지만 헌법재판소는 여러 차례 ‘국회의 문제는 국회 스스로 해결해야 한다’는 답변만 반복했을 뿐이다. 그들에게 결정을 맡긴다는 것 자체가 정치적 실력이 없음을 자인하는 꼴이 될 것이다.

결국 다시 합의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 민주주의의 전통은 장기간의 치열한 투쟁을 통해 담금질되는 것 아니겠는가. 그리고 그 전통은 오로지 국민이 뽑은 주권의 대리인인 국회의원들이 만들어가야 하지 않을까. 국회 파행 사태는 합의에 의해 국회가 스스로 해결해야 한다. 그리고 그 해결의 실마리는 바로 집권 여당에 있다.

국민은 안다. 종편 9시 뉴스의 여론조사 결과에서 보듯, 국민은 새누리당의 강행 처리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한다.(여당의 단독 강행 처리에 찬성 의견 30.4%, 반대 의견 47.6%) 이제 국민이 국회의원, 당신들에게 원하고 있다.

박지웅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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