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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3.12.23 19:12 수정 : 2013.12.23 19:12

2003년 건국대 학생 두 명이 ‘이적’ 행위를 한 혐의로 체포되었다. 두 학생이 범법 행위를 한 증거는 카를 마르크스의 <자본론>, 루이 알튀세르의 <마르크스를 위하여>, 조지 카치아피카스의 <신좌파의 상상력>이라는 세 권의 책을 소지하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카치아피카스는 그의 새 저서 <아시아의 알려지지 않은 봉기들>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 학생들은 자신들이 소유하고 있던 책의 일부분을 인용하여 전단지를 제작하였고, 이를 철거 예정이었던 주변 지역에 배포한 듯하다.”

그로부터 약 10년 뒤, 2013년 9월27일 알튀세르의 제자 중 한 명인 프랑스의 철학자 알랭 바디우가 한국을 찾았다. 그는 ‘지제크/바디우 철학축제’라는 제목 아래 좌파 철학·정치·예술에 대해 논의하는 콘퍼런스에서 기조연설을 했다. 이 행사에는 슬로베니아의 정신분석적 철학자 슬라보이 지제크, 중국의 문학비평가이자 칭화대 교수 왕후이, 그 외 국내외 학자들이 대거 참여했다. 이 콘퍼런스는 한국의 성형 중심가인 강남에 있는 복합문화공간 플래툰 쿤스트할레에서 열렸다. 공산주의와 마르크스주의에 관한 행사가 열린 곳이 가수 싸이 덕에 유명하게 된, 요란한 소비문화 구역인 강남이라는 점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이 아이러니를 더욱 복잡하게 만드는 것은 강남으로부터 북쪽으로 35마일 거리에 비무장지대(DMZ)와 냉전의 상대국이 있다는 사실이다.

지제크는 행사의 마지막 강연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곳 남한에서 공산주의를 논하는 것은 아마 미친 짓으로 보일지도 모릅니다. 분단된 한국은 냉전 종식 뒤 오늘날 가장 명확히 상상적이고 병적인 케이스가 아닐까요?”

지제크는 현재 경희대학교의 글로벌 에미넌트 스칼라로 체류중이며, 열광하는 수많은 청중들 앞에서 두 번 강연했다. 만약 프로이트의 정신분석 모델을 좌파 학계에 적용한다면, 지제크는 본능적인 이드(id) 역할을 맡아 비꼬며, 지저분한 농담과 음담패설을 하고, 거기다 성, 정치, 예술, 과학, 대중문화에 관한 논평들을 난잡하게 결합시킬 것이다. 바디우는 현실적인 자아(ego)가 되어, 조용하고 차분하게 공산주의와 보편성, 그리고 진리를 옹호할 것이다. 이렇게 된다면 윤리적인 초자아(superego)는 당연히 노엄 촘스키 몫인데, 이론이나 추상적 개념을 금지하는 그는 이드를 억압하려고 고군분투할 것이다.

유럽대학원대학의 교수인 바디우는 자신의 기조연설 ‘긍정적 변증법’에서 “공산주의에 관해 말하기가 어려운 데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다”고 말하면서 “과연 오늘날 우리가 공산주의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것이 가능하기나 한 것인가?”라고 물었다. 바디우는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공산주의 이론은 북한이라는 군사주의 독재국가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음을 명확히 했다. 공산주의 이론은 단순히 인간의 삶과 평등주의를 위한 정치적 열정과 확신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이 오래된 단어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는 데는 용기가 필요하다. 그리고 이를 통해서만 공산주의라는 단어를 20세기의 짐으로부터 분리시킬 수 있다.

바디우에 따르면, 고전적 변증법은 부정으로 시작되며 거기서 “정치적 투쟁의 발전은 근본적으로 어떤 것에 대한 반역이나 반대, 부정이다.” 반면에 긍정적 변증법은 이 논리를 뒤바꾸어서 “긍정 혹은 긍정 명제는 부정 이후가 아니라 그 이전에 온다.” 여기서 긍정되는 것은 급진적 변화를 일으킬 수 있는 가능성을 만들어 내는 기회 또는 사건이다. 곧 “어떤 사건은 단지 법, 규칙, 상황의 구조 등을 중단시키고, 새로운 가능성을 만들어 낸다.” 그러나 우리는 이 사건을 이해할 적절한 단어나 개념을 갖고 있지 않으며, 진상을 접한 이후에야 사건에 대해 이해하게 되기 때문에, 우리는 자본주의의 대안, 다른 세계의 가능성에 열려 있는 순간적인 기회를 놓치고 지금까지 살아왔던 그대로 살아가게 된다.

바디우의 공산주의 이론을 지탱하는 키워드, 곧 긍정, 새로움, 가능성, 인류, 보편성, 진실 등은 매우 설득력이 있다. 바디우의 연설을 들은 후, 필자는 보수적인 필자의 어머니까지도 바디우의 사상을 받아들이고 그에 동참할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지제크는 냉전이 종식되었다고 했지만, 사실 한국에서 냉전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러므로 이 나라에서 ‘공산주의’라는 단어가 정치적으로 통용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은 대단히 중요하다. 바디우, 지제크, 왕후이, 그리고 많은 학자들이 대규모의 진지한 관중들에게 이 단어에 관해 강연했다는 사실은 공산주의에 관해 한국에서 말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한다. 그러나 이 단어가 조슈아 클로버가 언급한 ‘콘퍼런스 공산주의’의 영역을 넘을 수 있을지는 또다른 문제다.

독재정치를 한 박정희 대통령의 딸인 박근혜가 대한민국의 대통령이 되었다는 사실을 놓고 볼 때, 좌파 세력들이 신뢰를 얻고 싶다면 이 오래된 단어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려고 노력하기에 지금이 최적의 시기는 아닐 것이다. 이와 동시에, 사회적 평등과 공동체적 삶을 위한 투쟁은 과거는 물론이고 현재도 한국의 시민 사회에서 핵심적이다. 한국 현대사는 일본 식민주의, 미국 제국주의, 권위주의 정부, 경제적 착취, 그리고 신자유주의에 반대하는 민중들의 봉기로 점철되어왔다. 분석에 따르자면, 이 민중봉기에는 현실에 대한 긍정과 부정, 기존 현실에 반대하거나 새로운 현실을 창조하는 것이 동시에 포함되어 있다. 카치아피카스는 저서 <아시아의 알려지지 않은 봉기들>에서 이러한 역사를 요약하여 다음과 같이 썼다.

“한국의 길고도 피로 물든 20세기 역사에서 나온 가장 중요한 산물 중 하나는 바로 이 나라의 국민들이 갖고 있는, 자신들의 힘에 대한 신념이다. 한국인들은 자신들이 역사의 주체이자 객체라는 사실을 직관적으로 이해했고 재점화된 상상력으로 이러한 신념을 갖게 되었다. 집단행동 능력은 지난 시절의 투쟁에서 얻은 위대한 유산이다. … 민중들의 엄청난 행동능력은 땅을 뒤흔든 사건들의 근원이며 이는 시민 사회에 깊이 뿌리 박힌 자질이다.”

드라마 <여왕의 교실>은 초등학교 6학년 학생들이 지도자 없는 민주주의를 만들고, 집단 따돌림을 근절시키고, 단체로 자신들의 선생님을 반대하는 이야기를 소재로 하고 있다. 미국 드라마는 마약을 진지하게 다루고, 한국 드라마는 교육을 진지하게 다루는 것이 많은데 <여왕의 교실>은 평등주의에 대한 열렬한 확신을 보여준다. 바디우의 이론에 들어 있는 많은 요소들은 이미 한국의 현실에서 작동되고 있다. 그러나 한반도의 지정학적 긴장 요소를 고려했을 때, 그리고 현 대통령이 부분적으로는 냉전 편집증을 이용해 당선되었다는 점을 미루어 볼 때, 한국에서 ‘공산주의’라는 단어가 당분간은 20세기의 묵직한 짐으로부터 쉽사리 분리되지는 않을 것이다. (번역 김주란, 번역감수 이영준)

존 에퍼제시 경희대 영문학과 부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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