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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4.01.01 19:35 수정 : 2014.01.01 19:35

일러스트레이션 김선웅

-‘건강권에 관한 서울시민회의’ 후기

연말연시이면 낯익은 풍경이 있다. 텔레비전과 일간지 지면에 등장하는 우리 주변의 ‘불우한 이웃들’의 힘겨운 겨울나기, 그리고 각지에서 쏟아지는 ‘온정’에 대한 짧은 기사들이 그것이다. 매년 반복되는 이런 모습에 우리는 왜 묻지 않았을까? ‘그들은 왜 늘 빈곤한가?’, ‘긴 시간을 지나도 가난한 이의 삶은 어찌하여 같은 모습인가?’ 우리가 궁금해하지도 묻지도 않는 동안, 너무나 익숙하지만 사실은 알지 못하는 그들의 삶은 그렇게 의미 없이 소비되어왔다. 지난 11월30일 ‘건강권에 관한 서울시민회의: 서울시민, 건강권을 선언하다! 쪽방 주민의 삶을 중심으로’라는 긴 제목의 시민회의가 시작되었다. 12월14일까지 총 4회에 걸쳐 이루어진 이 회의에 나는 13명의 시민 패널 중 한 명으로 참여했다. 전문가 및 관계자들의 참여를 최대한 배제한 채, 순전히 시민들의 힘으로 서울 시민의 건강권에 관한 선언문을 작성하는 것을 최종 목표로 한 이번 회의는 ‘아래로부터’의 사회 정책 제안의 한 과정이라고 볼 수 있다. 더불어 개인이 스스로를 ‘시민’으로 인식하고 공동체적 연대감을 형성함으로써 시민 의식을 회복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주었다는 점에서 시민사회운동의 또다른 형태로도 볼 수 있을 것이다. 12월13일과 14일, 양일간 진행된 본회의에 앞서, 우선 11월30일과 12월7일, 두 차례에 걸친 예비모임이 열렸다. 예비모임 첫날, 패널들은 인권과 건강권 및 쪽방 주민의 건강 관련 실태에 대한 기본 정보들을 제공받고, 조별 토론 및 전체 토론을 통해 의견을 교환하는 기회를 갖게 되었다. 이날의 토론은 건강권 문제에 관한 패널 간 관점의 차이가 여실히 드러난 시간이었다. 조별·개인별로 다소 겉도는 것 같았던 논의는 건강을 개인적 차원으로 다루어야 하는가, 사회적 차원으로 다루어야 하는가의 문제부터, 서울 시민의 건강권과 쪽방 주민의 건강권을 구분하느냐 마느냐의 문제, 또 패널에 쪽방 주민이 포함되지 않은 것이 오히려 그들을 대상화하는 것이 아닌가에 대한 질문까지 광범위하고 산발적으로 이루어졌다. 이는 그만큼 건강권이 일반 시민들에게 낯선 개념이었으며, 우리 안에 ‘나와 다른 그들’이라는 구별짓기가 꽤나 단단히 자리잡고 있음을 반증하는 것이었다. 결국 짧은 시간 동안 이러한 논의의 합의점을 찾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점에 우리 모두는 동의했고, 동자동 쪽방촌 방문 및 주민들과의 만남이 예정된 2차 예비모임을 통해 이 문제들을 해결하기로 했다. 한 주 뒤에 열린 2차 예비모임에서는, 우선적으로 동자동 쪽방촌에 대한 영상 및 그곳에서 오랜 시간 활동하고 계신 간호사님의 강의를 통해 지역의 특성을 이해하는 시간을 보냈다. 이후 우리는 간단한 주의사항들을 숙지한 뒤, 현재 동자동 쪽방에 거주하고 계신 ‘가이드’분들을 따라 조별로 이동하였다. 한국전쟁 직후 피란민들의 판자촌에서 시작하여, 이후 주거 빈민들의 거주지로 이름만 달리하며 지난 60여년간 늘 그곳 ‘서울역 맞은편’에 자리해 온 동자동 쪽방촌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치 보이지 않는 섬처럼 존재해왔다. 쪽방에 대한 선입견과 달리 언뜻 보기에 서울의 오랜 동네들과 다르지 않았던 그곳은 안으로 들어간 순간, 완전히 다른 차원의 모습으로 다가왔다. 겨울인데도 사라지지 않는 악취, 차갑고 습한 공기, 빛 한 줄기 들지 않는 어둠, 1평이 채 되지 않을 것 같은 방들의 연속, 열악하다 못해 위험해 보이는 공동 시설 및 구조, 건물 벽과 벽 사이의 틈까지 칸을 막아 세를 놓는 모습은 흡사 찰스 디킨스 소설에 등장하는 19세기 영국 빈민굴의 모습을 떠올리게 했다. 동자동에는 분명 색이 있는데도 보이는 모든 것들을 가난의 색, 흑백으로 만들어버리는 힘이 있는 것만 같았다. 그렇게 설명할 수 없는 기분으로 돌아온 모임 장소에서 주민들과의 만남이 시작되었다. 약 1시간 반 동안 주민 한 분당 패널 두세 명이 함께 대화를 나눈 뒤, 조별로 그 내용과 생각을 정리하여 발표했는데, 유의미한 공통분모들을 찾을 수 있었다. 우선 건강 상태가 나빠질 수밖에 없는 생활 환경과 비현실적인 수급제도 및 의료 제도하에서 쪽방 주민들의 자립이 불가능하다는 점, 그리고 쪽방 주민들을 힘들게 하는 것은 경제적·신체적 어려움만이 아니라, 사회관계망에서의 소외문제가 크다는 것 등이 주요 지점이었다. 이를 통해 우리는 건강권이 단순히 건강할 권리가 아닌, 정치적·경제적·사회관계적 차원에서 건강에 영향을 끼치는 모든 것에 대한 권리를 말한다는 것에 합의할 수 있었다. 또한 이러한 건강권을 가장 침해받고 있는 계층인 쪽방 주민들을 우선으로 바라보는 것이 좀더 포괄적인 범위로 우리 모두의 건강권을 보장받을 수 있는 길이라는 것 또한 이해하게 되었다. 다시 한 주가 지나 앞선 예비 작업을 통해 정리된 생각들을 본격적으로 선언문으로 만들어야 하는 본회의가 시작되었다. 각각 8시간씩 이틀간 이어지는 본회의의 첫날은 이전에 패널들이 인권과 건강권, 사회보장에 대해 의문을 제기했던 부분들을 더 명확히 해줄 전문가 세 분의 강의 이후, 전문가·패널·참관인·관계자들 간의 질의응답 시간으로 이루어졌다. 약 4시간에 걸친 질의응답 및 토론에서 나는 무엇을 어디부터 어떻게 해야 할지 난감해하던 첫날 토론과는 달리, 패널들이 가진 건강권에 관한 관점과 의문점이 명확해졌다는 점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그렇게 장시간의 질문과 토론을 거친 뒤, 패널들은 각각 자신이 생각하는 건강권은 무엇인지 개별 선언문을 작성하며 다음날을 준비했다. 이튿날 시민회의의 마지막 날인 본회의 둘째 날은 최종 선언문을 작성하기에 앞서, 전날 작성한 개인 선언문을 각자 발표하고, 조별로 선언문의 개략적 내용을 구성하는 것으로 시작하였다. 조별 선언문 내용에 대한 발표와 토론이 이루어진 뒤, 우리는 최종 선언문을 온전히 패널만의 힘으로 만들어 나가야 했다. 나는 우연찮게 그 과정에서 사회를 맡게 되었는데, 어떠한 틀도 방향도 제시되지 않았기 때문에, 패널들은 선언문 작성의 모든 과정을 서로 논의하며 정해야만 했다. 보편적 인권의 범주에서 건강이 왜 중요한지, 우리가 말하는 건강권이 무엇인지, 그것을 위해 보장받아야 하는 것은 무엇이며, 현재 쪽방 주민들이 침해받고 있는 권리는 무엇이 있는지, 이 선언문을 향후 어떻게 이용할 것인지 등을 합의하는 과정은 이전 3일간의 시간보다 더 어렵게 느껴졌다. 문장 하나 단어 하나까지 함께 손보며 때로는 박수치고, 때로는 논쟁하는 과정에서 탄생한 건강권 선언문은 여전히 아쉬운 점이 많고, 최고의 결과물이라 말할 수도 없다. 또한 이것이 현실 문제의 해결에 얼마나 도움이 될지에 대해서도 확신할 수 없다. 하지만 건강권이라는 것에 대한 전문지식 하나 없는 일반 시민들이 모여 나흘 동안 토론을 거듭하고 숙의하는 과정을 거쳐 스스로를 위해, 그리고 나의 이웃인 사회적 약자를 위해 옳은 것을 요구했다는 것은 한번쯤 그 의미를 되짚어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위로부터의 권력에 한계를 느끼는 요즘이다. 시민사회가 시민이 권력 주체로 모두를 위한 삶의 조건을 구성해가는 것을 의미한다면, 이번 건강권에 관한 시민회의가 그 옳은 길에 한 걸음 보탬이 되었길 바란다.

김정현 건강권에 관한 서울시민회의 시민패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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