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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냐면] 안창호와 윤치호, 누가 애국가 작사자일까 / 오동춘 |
흥사단에서 100년 넘게 불러오는 애국가는 누가 지었을까? 1955년 애국가 작사자 논란 끝에 정부의 공식 발표는 작자 미상이다. 애국가 작사설에 오른 안창호, 윤치호, 최병헌, 김인식, 민영환 등 모두 결정적 근거가 없기 때문이다.
흥사단 창립 100주년을 앞두고 4년간 심혈을 기울여 흥사단에서는 새로 찾은 많은 결정적 근거에 의하여 한평생 독립운동을 한 도산 안창호(1878~1938)임을 이미 논문으로 발표한 바 있다. 조선조 말기 독립협회, 독립신문 회장으로 민족 지도자였던 윤치호(1865~1945)는 안창호가 설립한 평양 대성중학교장으로 도산과 교육 동지이기도 했다. 그러나 일제가 105인사건 주모자로 윤치호에게 중형을 가하여 3년의 옥고를 치른 그는 친일로 전향하여 일제 30년간 내선일체, 황민화정책, 전시동원체제 등에 적극 협력하고 민족에게 어록 한마디 없이 광복되던 해 작고했다.
미국에서 을사늑약으로 나라의 위기를 느낀 안창호는 1907년 2월20일 신민회 조직차 귀국하여 3월 경칩 무렵 들른 선천예배당에서 찬미가 소리를 듣고 시상을 얻어 그길로 평양에 올라가 사철을 배경으로 “동해물과 백두산이” 애국찬미가를 지어 선천교회에 보냈다. 영국 민요에 얹어 부르는 이 애국찬미가가 선천 일대 애창곡이 되었다. 이 애국찬미가가 오늘의 애국가 원형이다. 이 애국가를 서서만리현 의무균명학교 학생들과 3월 중순에 매주 애국조회 때 안창호가 학생들과 함께 불렀다는 기사가 1907년 3월20일치 <대한매일신보>에 보도되어 있다.
안창호의 애국가 작사자로서의 증언은 대표적으로 독립운동가 구익균(1908~2013), 윤형갑(1904~1961)과 선천교회 김정수(1894~1976) 권사가 뒷받침하고 있다. 윤치호는 안창호가 지은 주권재민 혁명가인 애국가를 가사 일부를 변조하여 1908년 6월에 만든 역술 찬미가 14장에 황제충성가로 옮겨놓았다. 애국가 작사자로 윤치호 이름이 여기저기 보이는 것은 역술 찬미가를 윤치호 저작으로 보는 착각에서 비롯된 것이다.
1월30일 혜문 스님은 문화재 제자리찾기 차원에서 미국 에머리대학 도서관에 있는 1945년본 윤치호 친필 애국가 붓글씨 가사지를 찾으러 간다고 한다. 이 윤치호 애국가 가사지는 윤치호의 사위 정광현 교수 고백에 따르면 1945년 윤씨 가문 기념으로 유족의 권면에 의하여 1945년 10월께 임종 무렵 쓴 것으로 판명된 것이다. 그리하여 당시 정부의 애국가작사자조사위원회의 인정을 받지 못하였다. 1997년 윤치호 자녀들이 그의 모교 에머리대학에 기증한 선물을 마치 문화재나 국가기록물로 착각하여 100명의 환수위원회까지 구성하여 1월30일 안민석 의원과 함께 도미하려는 혜문 스님은 이 계획을 취소하는 것이 좋겠다. 윤치호의 애국가 붓글씨는 1907년 작도 아니고 옛 맞춤법도 아닌 현대 한글글씨로 쓴 것인데 아직 필적 감정도 없는 것을 자녀들이 에머리대학에 준 선물이요, 우리의 문화재적 가치가 없는 물건이기 때문이다. 윤치호가 친일인사라도 애국가 작사자는 될 수 있으나 우리 흥사단의 객관적 연구 결과 결정적 근거는 하나도 없다. 무리한 주장이나 논리가 있을 뿐이다. 2015년 광복 70주년까지는 정부는 애국가 작사자를 확실히 밝혀야 할 것이다. 우리 현명한 남북 7000만 겨레는 나라 사랑의 화신이요 겨레의 스승인 도산 안창호를 애국가 작사자로 생각하리라 믿는다.
오동춘 흥사단애국가작사자규명위원장·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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