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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냐면] 애국가 작사자 규명은 역사적 과제다 / 안민석 |
해방 70돌인 내년 8·15에 애국가 작사자를 규명하여 발표하자는 필자의 제안에 많은 분들이 활발한 토론으로 화답해 주고 있다. <왜냐면>에서도 논쟁이 한창이다. 언젠가 서로의 진정성을 확인하며 말씀을 나눌 기회가 있을 것이다.
애국가 작사자 규명은 반드시 해결해야 할 역사적 과제라는 소명의식으로 시작한 일이다. 이번 설에도 연휴를 반납하고 미국 로스앤젤레스와 애틀랜타를 다녀왔다. 도산 안창호 선생의 장녀 안수산 여사와 윤치호 유품이 기증돼 있는 에머리대 관계자들을 직접 만났다.
안 여사는 부모님과 주위 어르신들이 생전에 애국가를 아버님이 지었다고 수도 없이 말씀하셨다고 하시면서 증거가 없는 것을 너무나 안타까워했다. 반면, 애틀랜타 에머리대에서 윤치호의 친필본 애국가와 일기장 등 관련 유품을 열람한 필자의 감회는 안 여사 면담 시 느꼈던 것과는 크게 상반됐다. 증거는 많은데, ‘진위성’을 확신할 수 없었던 탓이다.
‘잘못된 역사도 역사다. 증거만 명확하다면 무엇이 문제이랴!’ 그러나 윤치호의 친필본을 마주하고 선 필자의 마음은 착잡하기만 했다. 윤치호 유족들의 친필본 기증 경위와 동기도 불명확했고, 친필 여부에 대한 과학적인 규명도 없었으며, 무엇보다 ‘작성 의도’와 ‘시점’이 의심스러웠기 때문이다.
‘1995년 국편 심의 당시 문서 작성 시기가 1945년이라고 했다는데, 왜 윤치호는 애국가를 작사했다는 1907년에 그것을 잘 써서 남겨두지 않고, 1945년에 가서야 친필본을 남겼을까?’ 현장에서 확인한 윤치호의 3녀 윤문희씨의 친필은 이런 의문을 더 부추겼다. 윤씨가 친필본 문서 뒷면에 딸인 자신의 요청에 의해 1945년 9월에 작성하였다고 적어 놓은 것을 발견한 것이다.
1943년 친필 일기 원본 뒷면에는 자신이 쓴 금전 기록들이 깨알같이 적혀 있었다. 78살에도 이처럼 꼼꼼하게 기록하는 습성을 가지고 있던 사람이 왜 애국가 작사에 대해서는 1907년 일기에 한마디도 하지 않았을까. 1907년 일기에서 국왕을 비판하는 등 하고 싶은 얘기를 마음껏 썼던 사람이 애국가 작사를 일기에 쓰지 않은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혹시 윤치호와 그 유족은 친일 행적에 조금이라도 면죄부를 받기 위해 애국가를 작사했다고 주장하려 했던 것은 아닐까?’ 해방정국에서 친일행위에 대한 심판 요구가 팽배하자 위기감을 느낀 윤치호 가족들이 애국가 작사로 면죄부를 받으려 했을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
현재의 애국가는 1908년에 윤치호가 역술(譯述)했다는 ‘찬미가’라는 미국 성가 중의 하나로 알려져 있다. ‘역술’은 창작이 아니라 ‘번역해서 썼다’는 말이다. 세월이 흘렀다고 ‘역술’이 ‘작’이 될 수는 없으므로 1908년에 ‘역술’이었던 것이 1945년에 ‘작’이 될 수는 없다. 따라서 윤치호가 친필본에서 ‘작’(作)이라는 표현을 쓴 것도 의심스러운 대목이다.
애틀랜타 한인회의 이민사 기록에도 윤치호가 애국가의 여러 작사자 중의 한명으로 기록돼 있었다. 최초의 미국 유학생으로 에머리대를 다닌 윤치호에 대해 큰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현지 한인회가 윤치호를 단독 작사자로 단정하지 않는다는 사실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여겨졌다. “애국가는 대한국인 모두의 공동 창작물”이라는 노동은 교수의 주장이 자연스레 떠올랐다.
이번 방미를 통해 필자는 도산 선생 작사설은 증거가 부족하고, 윤치호 작사설은 친필본의 진위성과 작성 의도에 짙은 의혹이 있다는 잠정 결론을 내렸다. 애국가 작사자 규명을 위해서는 윤치호의 필적에 대한 과학적인 감정이 선행돼야 한다. 학술적 검증과 지난한 국민적 논의, 합의 과정도 필요하다. 이제 해방 70돌이 얼마 남지 않았다.
안민석 민주당 국회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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