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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냐면] ‘또 하나의 약속’이 1000만 영화인 이유 / 박경신 |
1912년 타이타닉호가 침몰한 후 가장 면밀한 탐사가 이루어진 것은 1997년 개봉한 영화 <타이타닉> 제작팀이 영화촬영을 위해 탐사를 했을 때였다. 영화 초반에 무인탐사기가 침몰한 배 안의 구석구석을 훑는 장면은 현실에서도 가장 진보한 탐사 장면이었다.
영화가 현실을 선도하는 사례들은 우리나라에서도 작은 규모로 나타나고 있다. 영화 <도가니>가 취약자 수용시설 내 성폭력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켜 2011년 ‘도가니법’의 통과를 이끌어냈고, 영화 <이태원 살인사건>은 미국으로 달아났던 제2의 용의자 수사를 15년 만에 재개시켜 범죄인 인도 신청으로 이어졌고, 영화 <부러진 화살>은 법관의 독립성에 대해 강한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이제 그럴 법한 영화가 하나 더 나타났으니 그것이 <또 하나의 약속>이다. 우선 이 영화의 폭발적 현실성은 회피하기 어렵다. 수년간의 투쟁 끝에 황유미씨의 죽음에 대해 법원이 산재인정을 하였지만 2011년 근로복지공단은 이에 대해 항소를 하여 현재 대법원에 계류 중이다. 근로복지공단의 항소는 산업재해제도가 고용주 과실의 입증책임과 보상액수의 예측 가능성을 맞바꾸자는 노사 간의 대타협 정신을 바탕에 둔 전세계적인 합의를 위반한 폭거였다(<한겨레> 2011년 7월12일치). 게다가 황유미씨의 동료들의 죽음에 대해서도 산재인정을 거부하다가 2012~2013년 법원에 의해 거부처분이 취소되자, 근로복지공단은 “판결을 받아들이면 황유미씨의 항소심에 영향을 준다”는 말도 안 되는 이유로 다시 항소를 하는 악질적인 반노동자적 만행을 반복하고 있다. 이 영화가 호명하는 현실 자체가 지뢰밭이다.
또 이 영화는 보편적이다. 나는 영화 <변호인>에 대해서, 이전 영화들이 거의 다루지 않았던 1980년대 대학가의 민주화운동을 가장 직설적으로 묘사했고 지금은 여러 정당정파로 나뉜 과거의 학생운동가들과 그들을 옆에서 가슴 졸이며 바라보았던 동료들 모두를 울릴 영화라고 평하면서 그 보편성에 힘입어 1000만 영화가 될 거라고 예측했다. <또 하나의 약속>도 산업재해제도에 대한 최초의 본격적인 극영화다. 1000만 노동자가 모두 관심을 가질 만하다.
이번 영화가 입증책임을 외국의 선진적인 수준으로 전환시킨 ‘삼성백혈병법’이나 대법원 판례로 이어지지 않아도 좋다. 제발 근로복지공단의 퇴행적인 행정에는 영향을 주었으면 좋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의 현실세계에서의 힘이 꺾일 것 같은 징조가 보인다. 영화가 좌석점유율 1위를 하고 있다. 보통 현실에 대한 영화가 이렇게 승승장구하게 되면 언론은 영화 속의 주인공에 대한 인터뷰, 사실과 영화의 ‘같은 점/다른 점’ 보도를 경쟁적으로 내놓는다. 그런데 이상하게 그런 조짐이 보이지 않는다.
대신 내가 몇 자 적고자 한다. 이 영화의 가장 큰 특징은 사실에 매우 충실하다는 것이다. 특히 황유미씨의 발병과 사망에 대한 삼성 쪽의 반응 부분이 그러하다. 산업재해를 신청하는 사람을 무시하는 태도로 대한 삼성전자 원무과의 반응이나 “4000 주고 다시 4000 주겠다”고 해놓고는 수술비가 필요할 때 전화를 받지 않다가 나중에 소액으로 무마하려고 했던 것은 모두 사실을 재구성한 것이다.
게다가 좌석점유율 1위를 달리고 있으면서도 <부러진 화살>이 245개, <남영동 1985>가 308개를 받은 상영관을 제대로 받지 못하는 상황은 씨지브이(CGV)·롯데·메가박스 3사가 90% 이상의 스크린 수를 점유하고 있는 상황, 삼성전자가 우리 사회에 끼치고 있는 영향과 무관하지 않다.
영화감독 김태윤이 고맙다. 이제 우리는 집회나 시위에 나가지 않고도 기부금을 내지 않아도 영화 한 편을 봄으로써 ‘참여’할 수 있게 되었다. 상영관 독점, 근로복지공단, 대기업 독점 문제 모두에 대해 한꺼번에 조용히 발언할 수 있게 되었다. 노동자들이여, 여러분이 작업장에서 또는 과로로 쓰러졌을 때를 생각하라. 노조에 가입하지 않아도 좋다. 무서운 파업에 참여하지 않아도 좋다. 이 영화는 꼭 봐 달라.
박경신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관련영상] [한겨레 캐스트 #238] "삼성이 응답하라", 영화 <또 하나의 약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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