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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냐면] ‘강신주’의 대중인문학은 무엇인가? / 정혁 |
‘대중 인문학’ 현상을 분석한 문강형준의 글(<한겨레> 2월8일치 23면)을 읽었다. 그는 ‘대중 인문학’에 대한 열풍 이면에 ‘종교적 색채’와 ‘취약한 대중’이 놓여 있다고 분석한다. 실제로 방송을 통해 ‘대중 인문학’ 열풍의 중심에 서 있는 철학자 강신주의 강연이나 상담을 보고 있노라면 그의 강인하고 직설적인 화법과 논리에 쉽게 압도된다. 강신주 스스로도 그에게 상담을 요청하는 사람들이 ‘거짓말을 못하는’ 약자임을 적시하고 있으며, <다상담3> 말미에 다상담을 그만두는 결정적인 이유를 자신이 교주화되고 있기 때문이라고 쓰고 있기도 하다.
과연 강신주의 ‘대중 인문학’은 수많은 ‘자기 계발서’나 종교인들의 ‘멘토링’들과 동류요, 동급인 것일까? 문강형준은 “‘공부’는 스스로 읽고, 비판하고, 성찰하는 행위를 의미”하며 “대중에게는 이런 ‘공부’가 불가능하다고 믿는 것 자체에 이미 문제가 있다”고 비판하고 있다. 그러나 그 어느 누구도 처음부터 ‘스스로 읽고, 비판하고 성찰하는’ 사람은 없다. 스승이 있어야 공부가 시작되고, 스승이 있어야 스승을 넘어설 수 있는 것 아닐까? 문강형준이 비판하는 문제적 스승이라면 넘어진 제자를 직접 일으켜 세우는 권능을 행사하고 도저히 넘어갈 수 없는 산으로 고집하는 스승일 것이다. 또 문강형준은 “사회적 문제에 대한 구체적 분석보다 개인의 자아에 집중한다는 점”도 비판하고 있는데, 오히려 강신주를 통해 그동안 우리의 인문학이 ‘앎에 대한 사랑’만 지극하고 ‘사람에 대한 사랑’은 허약했던 건 아닐까 반문해 보고 싶다.
강신주가 상담을 통해 설파하는 처방의 공통점은 그 해결책이 대개 사회의 통념이나 관습에 반한다는 것이다. 부모를 제거하라, 사랑하지 않으면 단호히 헤어져라, 뻔뻔해져라 등등, 결과만 놓고 보면 과격하거나 선정적이지만 그의 논의를 따라가다 보면 우리가 ‘자명하게 여기는 것들’에 직면하게 된다. 그리고 실은 우리가 그 ‘자명하게 여기는 것들’에 부딪쳐 넘어져 있는 상태임을 성찰하게 된다. 예컨대 라캉이나 들뢰즈와 같은 철학자들의 언어를 강신주처럼 우리 삶 가까이에 쏟아부어 생생하게 경험하게 하는 철학자를 나는 알지 못한다. 실제로 그 덕분에 며칠 전 고등학교를 졸업하는 제자들에게 강신주의 책을 한 권씩 쥐여주며, <다상담2>에서 그가 인용한 라캉의 말과 함께 이제까지 하지 않았던 것, 좋아하지 않았던 것을 실천해야 자신의 욕망을 가진 주체로 태어날 수 있다는 말을 들려줄 수 있었다.
‘대중 인문학’을 둘러싸고 있는 사회적 구조와 대중의 불안 심리를 분석하는 것 역시 인문학의 역할일 것이다. 그러나 그 분석에 휩쓸려 대중 인문학이 환기하는 인문학 스스로의 성찰과 반성 또한 놓쳐서는 안 될 것이다. 지난 시절 인문학이 ‘공부’와 ‘삶’을 분리하고 ‘지금 바로 넘어져 있는 나’로부터 시작되는 공부를 도외시해 왔거나, 혹은 그 공부에 무능했던 것은 아닌가 하는 질문 말이다.
정혁 경기도 수원시 권선구 금곡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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