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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냐면] ‘은폐된 위헌적 목적’이 통합진보당 해산 사유? / 정태호 |
통합진보당(이하 ‘진보당’) 해산청구 사건의 핵심 쟁점은 진보당이 이 당을 장악한 일부 세력의 조종을 받으며 은밀하게 북한식 사회주의 혁명을 추구해 왔느냐는 것이다. 이처럼 정당의 공개된 목적이 아닌, ‘은폐된’ 목적, 곧 일종의 ‘음모’의 위헌성을 정당의 해산 사유로 삼고 있는 경우 그 입증은 특히 엄밀하게 이루어지지 않으면 안 된다. 합헌적 야당에 누명을 씌워 이를 제거하는 수단으로 악용될 위험이 매우 크기 때문이다.
독일·터키 등의 정당해산 사건에서는 당의 위헌적 목적이 공식화되어 쟁점이 아니었거나 입증에 별문제가 없었다. 가령 1952년에 해산된 독일의 사회주의제국당의 경우에는 당이 공식적으로 나치즘을 표방한 것은 아니었으나 당의 인적 구성이나 과거 나치에 동조하였던 자들을 규합하려는 활동 등을 통해서 그 기본노선이 나치즘임이 명백히 입증되었다. 1956년에 해산된 독일공산당의 경우 정강, 당원교재 등이 이 당이 폭력혁명을 통한 사회주의 실현을 최종목적으로 하고 있음을 선명하게 말해주었다. 1993년 해산된 터키의 복지당 사건에서도 터키 헌법이 세속주의 원칙 위배를 정당해산 사유로 명시하고 있음에도 이 당은 정강에서 이슬람신정국가의 실현을 표방하였다.
이에 비하여 진보당 사건에서는 은폐된 위헌적 목적을 명백하게 입증하는 증거가 없다 보니 희미한 단서들에 의한 ‘퍼즐 맞추기’가 행해지고 있다. 독일공산당 사건에서는 명백하게 입증된 당 노선에 비추어 당 활동의 궁극적 의미가 평가되었다. 반면 진보당 사건에서의 입증은 반대방향으로 진행된다. 그 정강정책 중 얼핏 북한에 유리해 보이거나 좌파적 색채가 강한 것(가령 주한미군 단계적 철수, 국가보안법 철폐, 연방제 통일 방안, 평화협정 체결, 생산수단의 소유구조 다원화 등), 심지어는 우리의 현실에 대한 비판적 인식(가령 경제적·군사적 대외의존 상태), 정권의 독선적 행위에 대한 저항적 행위들까지도 은폐된 목적을 뒷받침하는 증거로 제시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접근법은 멀쩡한 정당을 희생시킬 위험성이 매우 높다. 이 퍼즐 조각들이 얼마든지 정부가 주장하는 것과는 다른 의미로 이해될 수 있고 또 그 자체로서는 위헌성을 띠지 않기 때문이다.
소수로 구성된 전위정당이 아닌, 10만 이상의 당원을 보유한 대중정당이 소수의 특정 세력에 의하여 장악된 채 은밀하게 국가보안법의 처벌 대상이 되는 목적을 추구하는 활동을 한다는 것이 과연 가능할까? 유권자는 물론 대다수 당원조차도 알 수 없는 은폐된 목적을 당 차원에서 추구한다는 것이 의미 있을까? 설혹 특정 세력이 은폐된 목적을 추구하였다고 하더라도 ‘은폐’, 곧 ‘비밀’의 속성상 그것은 진보당 자체의 문제가 아닌 일부 소수의 일탈이 아닐까? 김일성이 한때 ‘진보적 민주주의’의 실현을 목표로 했다는 사실이나 ‘민중주권론’에서 계급적 냄새가 난다는 것만으로 북한식 사회주의와의 필연적 연관성이 증명될 수 있을까? 진보적 민주주의라는 개념은 미국에서는 물론이고 해방 후 국내에서 상이한 주체들에 의하여 다양한 맥락에서 사용되었을 정도로 모호하다. 민중주권원리 역시 현실 민주주의가 소수 특권층에 의해 좌우되고 있다는 비판적 인식의 표현일 뿐 그 정치철학의 실체도 흐릿하고, 폭력혁명이나 경쟁 세력의 숙청이 그 실현방법이라는 명백한 증거도 없다.
최고의 헌법보호 수단은 법치·민주주의의 질적 고도화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정부가 진보당 해산청구를 통해서 수호하겠다는 ‘민주적 기본질서’는 정당의 위헌성에 대한 입증의 결과가 합리적 의심을 배제할 수 없다면 진보당에게 법적 책임을 묻지 말 것을 요구하고 있다. 진보당에 대한 종북몰이에 이은 무리한 재판은 우리 법치·민주주의에 대한 회의감만 키울 뿐이다.
정태호 경희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헌법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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