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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냐면] 드레퓌스와 유우성 / 권인혁 |
요즘 한국 사회를 떠들썩하게 만들고 있는 사건이 탈북자 출신 유우성씨의 북한 간첩 혐의 사건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이 사건이 100여년 전 프랑스 사회를 뒤흔들었던 드레퓌스 사건을 연상케 하여 묘한 감정을 유발하게 한다. 이 두 사건을 비교하기에 앞서 드레퓌스 사건의 내용과 전말을 고찰할 필요가 있다. 드레퓌스는 유대계 프랑스인으로 프랑스군 공병 대위였다. 그는 독일한테 프랑스 군의 군사기밀을 전달하였다는 혐의를 받고 간첩죄를 적용받아 종신징역을 선고받게 되었다. 1895년 수감되었는데 수감지는 남미 프랑스령 가이아나에 있는 외딴섬으로 주위 바다는 상어가 우글대는 생 조제프였다. 일명 빠삐용섬(1960년대 미국 영화로 유명해진, 한 번 들어가면 살아나올 수 없는 절해고도의 형무소가 있었던 장소)으로 알려진 곳에 유배되었다. 그는 억울하게 간첩죄를 선고받고 시국사범이 되었는데도 공병 장교 출신답게 고국 프랑스를 향하여 재단을 쌓고 아침저녁으로 기도를 하며 자기의 무죄를 끊임없이 주장하였다.
사필귀정, 진실은 언제나 밝혀지기 마련이다. 문호 에밀 졸라를 위시한 프랑스의 지성인들이 궐기하고 일어섰으니 에밀 졸라는 ‘나는 고발한다’는 유명한 공개서한을 발표하고 드레퓌스의 무죄를 주장하고 나섰다. 드디어 드레퓌스는 재심을 받고 무죄판결을 받아 빠삐용섬을 떠나게 되었고 4년 만에 프랑스에 있는 사랑하는 가족의 품으로 돌아올 수 있게 되었다. 이 빠삐용섬은 인권침해라는 악명으로 인해 후에 드골 대통령이 폐쇄시켰고 지금은 잔해만 남아 관광지로 이용되고 있다.
드레퓌스 사건이 발생했던 시절은 프랑스가 독일과의 전쟁에서 패한 뒤 반독일 감정이 극에 달해 있던 때였고 또한 반유대 감정이 널리 퍼져 있던 시절이었다. 이러한 시대 상황에서 유대계 장교였던 드레퓌스는 프랑스 사회의 욕구 불만을 충분히 만족해 주는 배출구였던 것이다. 말하자면 그는 희생양이 되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북한 간첩 혐의를 받고 있는 유우성씨의 경우를 드레퓌스와 비교해 보자. 두 사람 모두 각자가 속해 있는 사회로부터 주류에 속하지 않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유우성씨는 한국인이지만 탈북자 출신이고 드레퓌스는 프랑스인이었지만 유대인이었다. 두 사람 모두 양국 사회의 한계인 처지를 벗어나지 못하고 사회 주류의 사법당국으로부터 간첩죄의 의심을 받게 되거나 간첩으로 내몰렸다. 두 사람이 속해 있던 양국 상황을 살펴보면 본질은 다를지 모르지만 어딘가 유사성이 있음을 볼 수 있다. 프랑스는 나폴레옹을 통하여 한때 전 유럽을 호령할 정도의 강대국이었다. 그러한 프랑스가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에서 패하여 체면이 크게 손상되었으며 나폴레옹의 영광을 되찾을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우리 또한 일제로부터 해방이 되었지만 남북이 분단되었을 뿐만 아니라 끔찍한 6·25전쟁으로 인하여 남북은 아직도 적대관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유우성씨는 일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았지만 항고심에서 재판을 다시 받게 되어 있는 와중에 증거조작 문제가 발생한 것이다. 사건의 핵심은 간첩행위의 증거가 되는 문서가 조작되었다는 것인데 조작 여부는 앞으로 사법당국의 조사에 따라 밝혀질 것으로 보인다. 이 문서는 유우성씨의 북한 출입국 관련 문서로서 중국 당국이 발급한 것인데 주한 중국대사관에서는 이 문서가 정당하게 발급된 것이 아니고 위조된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또한 이 문서의 취득 경위라든지 이 문서와 관련된 인사들의 석연치 않은 행동으로 미루어볼 때 유우성씨가 북한 간첩이라고 단정하기에는 납득하기 어려운 면이 없지 않다. 따라서 사건의 해결을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중국 당국과 사법공조가 이루어져야 하고 이를 토대로 우리 사법기관에 의해 진실이 밝혀져야 하며 그 결과에 따라 관련자가 응분의 조처를 받아야 할 것이다.
국수적 국가주의와 폐쇄적 민족주의를 뛰어넘어 진리 추구를 최고 가치로 하는 지성이 드레퓌스 사건으로 왜곡된 프랑스 사회를 구해냈던 것이다. 우리의 지성은 어디에 있는가?
권인혁 전 주프랑스 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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