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4.04.02 19:21
수정 : 2014.04.02 19:21
|
일러스트레이션 김선웅
|
새학기가 시작된 지도 벌써 한 달이 지났다. 내가 사는 지역에서는 예비 중·고교생들이 정식으로 입학하기 전 2월에 배정받은 학교별로 배치고사라는 석차 결정시험을 통과해야 한다. 보통 공립학교는 3회, 사립학교의 경우 심하면 6~7회의 배치고사를 일주일 간격으로 치른다. 따라서 입학예정 학생들은 1월과 2월 내내 시험 준비에 몰입해야 한다. 입학 전이라 소속이 애매한 관계로 시험 준비는 주로 학원이나 개인과외 등 사교육에 사실상 의존할 수밖에 없는 실정이다. 따라서 사교육 관계자에게는 수능보다 더 큰 수입원이라지만 그 비용은 고스란히 학부모의 부담이 된다. 초등학교를 채 졸업하지 않은 채 아이들은 중학생 교복이 의미하는 무게를 절절히 실감하고, 중학 졸업예정자들은 대학 입시라는 지옥의 문턱에 선 자신의 운명을 비로소 자각하게 되는 것이다.
물론 학생에게 공부를 시키는 일 자체가 시빗거리가 되지는 않을 것이다. 문제는 이 배치고사를 실시하는 목적이 무엇인가에 있다. 학교 당국은 개인별 성적 측정, 방학 중 학습 유도(놀리지 않고 공부 시키기) 등과 신학기에 반 편성과 수준별 수업 실시를 위한 기초자료 수집을 이유로 삼는다. 즉 시험 성적에 따라서 석차별로 치우치지 않게(?) 각 학급에 우수자를 안배하고 나아가 국·영·수 과목에 대해 A B C 세 등급으로 나누어 실시되는 수준별 수업반을 짜기 위해서이다.
한마디로 학생의 학업 준비 정도를 알 수 있는 정보를 얻기 위해서인데, 그렇다면 이전 초등학교와 중학교에서 평가된 학업 성취 정도(성적)는 믿을 수 없는 자료란 말인가. 더구나 모든 중학교 3학년들은 12월에 고교 진학 자격을 평가하기 위해 도교육청이 시행하는 고입 연합고사를 치르며 그 시험 결과는 당사자와 해당 학교에 디테일하게 통보된다. 이런 평가 결과는 모두 신뢰할 수 없다는 말인지 도대체 이해하기 어렵다. 더구나 미리 시험이 출제될 교재를 선정해 주는 친절(?)을 베풀기 때문에 시험은 암기와 정답 고르기 기술을 연마하는 경연장이 되기 십상이다.
그렇다면 학생 개개인에 대한 정보 부족은 배치고사를 실시하는 합리적인 목적이 되기 어렵다. 그 숨은 의도는 우수한 인자(!)를 선별해서 실질적으로 우열반을 편성, 운영하기 위함이라고 생각된다. 실제 사립고에서는 배치고사 성적을 ○○반이니 ***팀이니 하는 성적 우수반을 설치하고 기숙사 학생을 선발하는 커트라인으로 삼고 있다. 심지어 몇 년 전부터는 일부 사립중에서도 학기 초부터 우수반을 편성해 야간 보충수업 및 자율학습을 시킨다고 한다. 그리고 그 출발선에는 배치고사가 있다.
중학교에 입학하기도 전에 아이들은 자동적으로 아주 세밀하게 나눠진 순위와 등급에 따라 ‘배치’되어 경쟁하거나 도태된다. 이 새삼스럽지 않은 관행은 속칭 명문 대학(또는 고교) 합격이라는 한국 사회의 정언명령을 내세우는 학교 쪽의 엄포와 오직 ‘빡세게’ 굴려야지 ‘좋은’ 학교로 아는 학부모들의 편견과 무지가 결합된 ‘교육열’로 포장된 욕망의 생뚱맞은 오브제에 다름 아니다. 그 뿌리는 역시 한국 사회의 유별난 줄세우기와 폭력적인 경쟁문화에 있을 것이다. 그래서 자신이 명문 중·고교임을 선전하는 학교일수록 경쟁적으로 배치고사 횟수를 늘린다.
백번 양보해서 순위 경쟁을 현실로 인정한다고 해도, ‘배치’라는 고약하고 민망한 용어는 쓰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 단어에는 학교 당국을 ‘갑a’로 교사를 ‘갑b’로, 아이들을 ‘을’로 취급하는 반교육적인 가치관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학교는 교사와 학생, 학부모가 수평적으로 더불어 꾸려나가는 작은 사회이다. 군대에서도 적성과 조건에 따라 신병에게 주특기 교육을 한 다음에 ‘배치’되는데, 학교에서 특성과 잠재력에 대한 진지한 평가 없이 신입생 때부터 ‘배치’되는 이 현실이 아이들에게 미안하기만 하다.
임영진 전남 목포시 부흥동
광고
기사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