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왜냐면] 위안부 피해 여성과 재일동포 그리고 6·15 세대 / 김우기 |
카메라의 셔터를 누르며 눈물이 멈추지 않은 것은 처음이었다. 다음 셔터는 손이 떨려와 결국 누르지 못했다. 그 자리에 있었던 사람 모두가 한 여성의 모습, 음성, 숨소리에 신경을 집중하고 있는 듯 보였다. 이 여성은 얇은 분홍색과 진한 자주색 저고리를 입고 연단 앞에 조그맣게 서서 부드러운 우리말로 조용히 말하고 있었다.
“내가 지금부터 말하는 게 너무 비참해서 여러분들이 듣기에 괴로울 겁니다. 그러나 전쟁을 두번 다시 해선 안 된다는 것을 여러분들에게 전하고 싶어서, 여기에 오게 됐습니다.”
그렇게 말한 뒤 일본군 ‘위안부’ 피해 여성인 길원옥 할머니의 증언이 시작됐다. 길 할머니는 지금은 북쪽 땅인 자강도에서 태어나 13살 때 취직시켜준다는 말에 속아 만주 하얼빈으로 끌려갔다. 그 후 ‘위안부’가 되어 군인들을 상대로 강제적으로 일을 하게 됐다. 그 당시 심한 성병에 걸려 아이를 낳을 수 없는 몸이 됐다. “세상 사람들이 하는 거 하나도 못 해보고. 음지에 숨어서 혹시나 내 과거를 누가 알까봐 그렇게 숨죽이며 살아왔어요….” 얘기를 시작한 뒤 그리 긴 시간이 지나지 않았지만, 할머니는 피로감을 드러내고 말았다. 할머니는 남쪽 자원자의 부축을 받으며 증언을 끝낼 수 있었다.
나는 지금까지 일본의 시민 집회에서 길 할머니의 증언뿐 아니라, 다른 피해 여러 여성들의 증언도 들을 기회가 있었다. 그러나 이번엔 지금까지 집회와는 다른, 말로 잘 표현되지 않은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 북, 남, 일본, 중국에 사는 조선의 여성들이 모두 함께 하나의 장소에서 같은 조선 여성이 일본군 ‘위안부’로 당한 피해 증언을 듣는 일이 가능했던 그 분위기는 무엇이었을까 지금도 생각하게 된다. “왜, 도대체 왜, 조선 여성이 이런 일을 당해야만 했을까.” 눈물이 떨어지는 소리도 들릴 만한 조용한 행사장에서 그 자리에 있던 이들 모두가 마음의 소리로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2000년 6·15 공동선언이 발표된 뒤 재일동포도 남측을 방문하는 기회가 점차 늘어 당시 고등학생이었던 나와 같은 세대는 재일동포 사회에서 ‘6·15 세대’라고 불렸다. 2007년 10·4 공동선언을 지나 통일이 정말로 가까이 온 것처럼 모두가 느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2008년 이명박 정권 이후 북남관계가 급속히 악화돼 재일동포 사회에서도 ‘6·15 세대’라는 말을 지금은 거의 쓰지 않게 됐다.
재일동포들의 상황을 말하자면, 남쪽 정부의 ‘여행증명서’ 발행 불허 조처에 의해 조선적을 가진 사람들이 남쪽에 가는 게 거의 불가능하게 됐다. 일본에서는 북쪽에 대한 편향된 보도가 나올 때마다 조선학교에 다니는 아이들이 공격 대상이 되고, 저고리가 찢기거나 두들겨 맞거나 “일본에서 꺼져” 등의 폭언을 듣거나 하는 경우가 많았다. 2002년 조-일 정상회담에서 납치 문제가 공식화됐을 땐 조선학교에 대한 폭언, 폭행 사건이 급격히 늘어나 조선학교의 여학생들이 더 이상 통학길에 치마저고리를 못 입게 됐다. 일본 정부는 2010년 시작된 ‘고등학교 등 수업료 무상화 제도’에서 적용 대상 외국인 학교 가운데선 유일하게 조선학교만 제외했다. 재특회 등 조선인 차별주의자가 ‘조선인의 목을 매라’ 등의 차별 선동 언어를 아무렇지도 않게 해대는 게 가능해진 것은 일본 정부에 의한 조선인 차별이 공공연히 이뤄지기 때문이다.
일본의 침략과 식민지배, 분단에 의해 세계 각지에 뿔뿔이 흩어진 우리 민족. 토론회를 통해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비롯한 일본의 과거 청산과, 재일동포에 대한 끊이지 않는 차별로 대표되는 식민주의의 극복만이 바로 평화통일의 중요한 과정이라는 것을 피부로 실감했다.
“통일되면 고향에 갈 수 있겠지 하면서 통일될 그날을 기다리며 살고 있습니다”라고 하신 길 할머니의 말을 가슴에 담아 앞으로도 일본군 ‘위안부’ 문제와 재일동포의 권리·생활 옹호를 위한 활동과 연구를 통해 통일로 가는 미래를 만들어 가고 싶다. 진정한 6·15 세대로서.
김우기 재일본조선인 인권협회 사무국원
기사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