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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4.04.23 19:10 수정 : 2014.04.24 09:35

폴란드 출신 영국 소설가 조지프 콘래드의 <로드 짐>은, ‘짐’이라는 야망에 찬 젊은이가 항해사가 되어서 수백명의 회교 순례자를 태운 ‘파트나’호에 승선해서 메카를 향해 항구를 떠나는 것으로부터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그런데, 배가 홍해를 지날 무렵 별안간 큰 폭풍을 만나 사구(砂丘)에 좌초해서 침몰 직전에 이른다. 겁을 먹은 백인 선원들은 승객을 배에 남겨두고 몰래 구명정을 내려서 자기들끼리 도망치려고 했다. 짐은 처음에는 주저했으나 막상 구명정이 떠나려고 할 때 자신도 모르게 몸을 날려 구명정에 오른다.

그들이 거친 물결을 헤치고 이튿 날 아침 가까운 항구에 들어가니, 이게 어찌된 일인가. 침몰했을 것이라고 생각한 ‘파트나’호가 멀쩡하게 항구에 들어와 있지 않은가. 이 사건으로 ‘파트나’호의 선원들은 비겁자라는 오명을 쓰고 뿔뿔이 흩어졌다. 이 소설은 명예를 중시하던 19세기 말 영국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누렸고 콘래드를 일류 작가의 반열에 올려놓았다.

여객선 ‘세월호’의 조난 사건을 가슴 졸이며 지켜보고 있는 시민의 한 사람으로서 좌초된 자신의 배에 승객을 남겨두고 먼저 퇴선한 선장과 선원들에 대한 소식을 접하면서 말할 수 없는 좌절과 부끄러움을 느낀다.

불행스럽게도 책임을 망각한 이와 같은 사례는 우리 사회 각계에서, 때로는 법이라는 이름으로 때로는 정치라는 이름으로 때로는 안보라는 이름으로 만연하고 있다.

몇년 전에는 저축은행의 부실경영으로 소액 예금자들이 큰 손해를 입은 일이 있었다. 그 사건도 알고 보면 고객을 기만하고 부실경영을 해온 은행당국의 임원들과 부실경영을 알고도 묵인한 금융감독원이 무한책임을 져야 할 일이다. 그들의 기만과 직무유기를 왜 가난한 예금자들이 져야 한다는 말인가. 최근, 법원의 인혁당 유가족에 대한 위자료 반환소송 또한 같은 맥락에서 보아야 할 일이다. 사법부가 정당한 절차를 거쳐 판결한 것은, 알고 했건 모르고 했건 판결한 당국이 책임을 져야지, “조사해보니 잘못 판결했다. 위자료를 반환하라” 하는 것은 사법부가 스스로 자신의 권위를 짓밟는 행위이다.

가장의 억울한 죽음을 안고 오랜 기다림 끝에 위자료를 받은 이들 중에 그 돈을 사용하지 않고 보관하고 있는 이는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들 유가족 중에는 반환할 돈이 없어 노역을 선택할 이들도 없지 않을 것이다. 과연 사회정의가 무엇인지 생각해야 할 문제이다. 필자는 ‘세월호’의 선장과 선원들을 성토하는 데 말을 보탤 생각은 없다. 다만, 이 수치스러운 사건이 우리 사회의 지도층 인사들이 직무에 대한 책임의식을 되새길 계기가 되기를 바랄 뿐이다.

도한호 국제PEN한국본부 이사


세월
조성순/교사·시인

세월이 바다 속에 누워 있다.
질식한 세월이 물속에 가라앉아 있다.

죽은 모양 침묵하던 느티나무
고목에 움이 돋아 자라고
민들레 노란 꽃이 홀씨 되어
흩날리는 봄인데

어이, 너희들은 가던 길 가지 못하고
어찌, 너희들은 돌아오지 못하고
거친 맹골 수역 차디찬 물살 속에
누워 있느냐?

누가,
왜,
너희들을 악마의 아가리에
들게 했느냐?
등꽃이 대낮같이 환하게 웃고 있는
운동장을
너희들이 없는 텅─ 빈 운동장을
한 바퀴 두 바퀴 서른 바퀴 돈다,
속죄하는 마음으로 운동장을
가슴속 복받쳐 오르는 눈물이여
한 바퀴 두 바퀴
서른 바퀴

속수무책의 세월
기다리지 말고

하늘이여
땅이여
이 땅의 어른 된 자여
선생이 되어 어린 것들
꽃피게 하는 자들이여
저 물살 속에 갇혀 오가지 못하는
생명의 꽃들
운동장 힘차게 달리는 야생마로
돌아오게 하라
눈보라 맞으며 거친 들판을
가로지르는 기관차가 되게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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