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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4.04.23 19:11 수정 : 2014.04.24 09:35

일러스트레이션 김선웅

2004년, 군납업체 직원 김선일씨가 이라크 무장단체에 피랍된 후 살해당했다. 이 과정에서 우리 정부의 외교력은 제대로 발휘되지 못했다. 중동전문가의 부재가 원인이었다. 같은 맥락에서 중동에 파견된 외교관 대다수가 비전공자로 전문성이 결여됐으며 파견국가의 언어 사용조차 서툴다는 지적이 나왔다. 당시 한국외국어대 중동연구소장 장병옥 교수는 미국 방송 <시비에스>(CBS)와의 인터뷰에서 “미국은 중동전문가가 3000명 정도이고 일본도 1000명가량 있다”며 우리 현실을 비판했다. 이후 ‘중동전문인력 양성’의 필요성이 대두됐고 2005년, 건국대 히브리학과가 히브리중동학과로 확대 개편됐다. 이스라엘 지역학까지 아우르는 중동분야 학과는 아시아 최초였다.

2007년, 필자는 히브리중동학과가 속한 학부로 입학했다. 샘물교회 사건이 벌어져 중동전문가의 필요성이 다시 공론화하던 때다. 동기 중 몇몇은 중동 전문가를 꿈꾸며 히브리중동학과로 진학했다. 그런데 2008년, 날벼락 같은 일이 벌어졌다. 히브리중동학과가 개편 3년 만에 폐지 통보를 받은 것이다. 개편 후 졸업생도 배출하지 못한 학과였다. 대학본부는 학생 수가 적고 취업률이 낮기 때문에 ‘비전’이 없다며 폐과의 배경을 밝혔다. 학과의 학문적 희소성과 사회적 필요성을 ‘비전’으로 홍보하던 때와는 상반된 태도였다. 절차적 문제도 심각했다. 폐과 통보는 방학 중 전자우편을 통해 이뤄진 게 전부였다. 해당 학과 교수들도 모르게 벌어진 일이다. 이후 선배와 동기들, 후배들과 함께 학사 구조조정 반대 투쟁으로 학교에 맞섰다. 공청회를 열고, 서명운동을 하고, 본관을 점거하고, 교육부까지 찾아가 집회를 열었다. 그러나 폐과 결정은 불가항력이었다.

히브리중동학과의 비극은 오늘날 다른 대학들에서 반복되고 있다. 제2, 제3의 히브리학과들이 학과 구조조정의 ‘칼바람’을 맞는 상황이다. 사상 최대의 전국적 규모로 말이다. 전국교수노동조합 쪽 자료를 보면 현재 서울에서는 경기대, 경희대, 고려대, 덕성여대, 삼육대, 성균관대 등에서, 지역에서는 강원대, 목원대, 경북대, 동아대, 영남대, 동의대, 서원대 등에서 학과 구조조정이 진행되거나 계획 중이라고 한다. 이는 정부가 대학을 대상으로 벌이는 여러 재정지원사업 선정에서 정원 감축을 조건으로 가산점제를 도입한 결과다. 각 대학은 알아서 기는 차원에서 학과의 통폐합을 결정하게 된 것이다. 문제는 많은 학과가 학생 수, 취업률 등의 수치가 학과의 존폐를 가르는 기준이 됐다는 사실이다.

학생 수와 취업률과 같은 수치는 전공의 학문적 희소성과 사회적 필요성을 반영하지 못한다. 통폐합 대상으로 거론되는 학과 중 학문의 다양성 확보 차원에서 필요한 학과가 적지 않다. 잠재적 가치를 따져 봤을 때 사회적 필요성이 큰 전공도 있다. 불어불문학과와 독어독문학과는 대학 구조조정 때마다 영순위 폐과 대상으로 거론된다. 그러나 국제사회가 다극체제를 맞이한 상황이다. 유럽의 언어와 문학에 대한 필요성이 적지 않음에도 배움의 기회는 줄어드는 모순적인 형국이다. 또, 중앙대에서 폐지가 결정된 비교민속학과는 우리 전통을 연구하는 희소성을 갖췄음은 물론 전통문화 보존 차원에서 필요성이 있는 전공이다. 원광대는 서예학과가 폐과 수순을 밟고 있는데, 이 학과는 세계 최초의 서예 전문학과라고 한다. 오늘날 각광받는 캘리그래피 분야와의 접목을 통해 충분한 잠재력을 지닌 학과로 평가받는다.

대학 정원 감축의 필요성은 있다. 그러나 이 명분만으로 무분별한 학과 통폐합이 용인될 수는 없다. 무엇보다 경제논리에 함몰된 사실이 우려스럽다. 이는 부메랑처럼 우리 사회의 짐으로 돌아올 염려도 있다. 대학 구조조정 무효화 주장이 비현실적이라면 최소한 학문의 가치를 외면한 무분별한 구조조정만은 막아야 한다. 대안으로 학문적 다양성과 사회적 필요성을 고려해 학과를 보호하는 방안을 고려해볼 만하다. 학문의 ‘그린벨트’를 세우는 셈이다. 교육부의 결단을 바란다.

금준경 건국대 커뮤니케이션전공 석사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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