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요메뉴 바로가기

본문

광고

광고

기사본문

등록 : 2014.05.07 19:12 수정 : 2014.05.07 19:12

세월호 참사를 목도하면서 ‘거대한 뿌리’의 시인 김수영이 열렬히 사랑했던 이사벨라 버드 비숍을 생각한다. 그는 영국 왕립지리학회 최초의 여성 회원으로, 1894년부터 네차례 11개월에 걸쳐 조선을 방문해 현지답사했다. 그가 본 고종 치하의 한국은 참혹한 미개인의 나라였다.

“한국 특권계급의 착취, 관공서의 가혹한 세금, 총체적인 정의의 부재, 모든 벌이의 불안정, 음모로 물든 고위 공직자의 약탈행위, 하찮은 후궁들과 궁전에 한거하면서 쇠약해진 군주, 자원 없고 음울한 더러움의 사태에 처해 있다.” “한국의 국가 관료들은 나라의 월급을 축내고 뇌물을 받는 일 외에는 할 일이 거의 없거나 전혀 없다.” “한국 사회는 약탈자와 피약탈자라는 단 두 계급으로 구성되어 있다.” “면허받은 흡혈귀인 양반계급으로부터 끊임없이 보충되는 관료계급”이 바로 그것이다.

비숍은 한국의 전통적인 정치질서의 틀에서 해방된 한국인의 모습에서는 희망적인 깊은 인상을 받았다. 시베리아 이주 한국인들의 농촌마을에서 한국의 역동적인 미래의 근거를 발견한 것이다.

1897년 비숍이 프리모르스크를 방문했을 때, 블라디보스토크, 니콜스크 근접지역 등에 많은 한국인촌이 형성되어 있었다. 그 무렵 한국 이주민의 전체 수는 1만6천명에서 1만8천명 수준이었다. 이들은 일정한 자치를 누리고 있었다. 지역의 경찰과 공무원을 포함한 모든 관리들은 한국인이었다. 특히 그들은 한국인들에 의해 뽑혔다. 고국에는 여전한 전통질서의 질곡으로부터 자유로웠던 이들의 삶은 “안정된 생활과 좋은 자치운영”을 누리고 있었다.

이러한 러시아 한국 이주민의 모습을 본 비숍은 한국인을 새롭게 정의했다. “한국에 있을 때 나는 한국인들을 세계에서 가장 열등한 민족이 아닌가 의심을 한 적이 있고 그들의 상황을 가망 없는 것으로 여겼다. 그러나 이곳 프리모르스크에서 내 견해를 수정할 상당한 이유를 발견하게 되었다. 이곳에서 한국인들은 번창하는 부농이 되었고, 근면하고 훌륭한 행실을 하고 우수한 성품을 가진 사람들로 변해갔다.”

비숍은 이러한 차이를 고국의 한국인들이 처해 있는 구태의연한 정치질서의 질곡과 그로부터의 자유로움에서 찾았다. “이들의 번영과 보편적인 행동은 한국에 남아 있는 민중들이 정직한 정부 밑에서 그들의 생계를 보호받을 수만 있다면 천천히 진정한 의미의 ‘시민’으로 발전할 수 있다는 믿음을 나에게 주었다.”(이삼성, <아시아의 전쟁과 평화>)

세월호 참사에서 비숍이 본 한국의 절망과 희망을 다시 본다. 나라 월급 축내고 뇌물 받는 일 외에는 할 일이 없는 정치인, 관료집단의 부패와 무능이 세월호 참사를 불러왔다. 따라서 구한말 비숍의 통찰이 오늘날도 유효하다.

법과 제도 정비를 게을리한 정치권, 안전 점검과 지도 감독은 하나도 하지 않고 관련업체로부터 뇌물을 받은 관료집단, 퇴직 후에도 한국선급, 해운조합 임원으로 취직해 세세만년을 누리는 그들에게 국민들은 한계를 넘어선 분노를 느끼고 있다. 행정고시 합격해서 사무관에서 시작해 장차관, 국회의원 2~3회, 시·도지사 2~3회 등 50여년을 부귀영화를 누리면서 사는 정치인 관료집단의 부패와 무능이 세월호 참사를 불러온 것이다.

민간인들은 어떻게 했는가. 최후의 1인까지 구조하고 순직한 민간인 승무원의 헌신적 희생 정신을 보라. 어민들의 생업을 내팽개친 거룩한 구조활동을 보라. 단원고 교감 선생님의 책임정신을 보라. 답지하는 자원봉사와 성금 행위를 보라.

세월호 참사에서 보듯 현재의 대한민국 정부는 차라리 없는 것이 낫다. 이제 한국 사회는 정치인·관료집단의 부패와 무능을 청산하고 민간의 헌신성, 자주성을 발휘할 수 있는 ‘시민정부’를 구성해야 한다. ‘시민정부’의 리더는 구한말 러시아의 한국이주민 마을 사례에서 보듯 시민이 직접 선택한 시민 출신 대표여야 한다. 시민은 거대한 뿌리다.

정범도 광주전남불교환경연대 공동대표

광고

브랜드 링크

멀티미디어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한겨레 소개 및 약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