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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4.05.14 19:12 수정 : 2014.05.14 19:12

5월16일. 세월호 참사가 발생한 지 한 달, 박영숙 선생님이 영면하신 지 꼭 일 년이다. 기막힌 시간 앞에서 박 선생님의 추모가 합당한 것인지 고민의 나날을 보냈다.

지난 몇 달 동안 박영숙 선생님이 남긴 글과 사진을 정리하여 소박한 문집 한권을 만들었다. 오래되어 바랜 1960년대 카드 원고부터 최근의 프린트물까지 수백장의 글을 읽으면서 몇번이나 깜짝 놀라곤 했다.

80년대에는 교회를 향해 늘 깨어서 정의를 지키라 하셨고, 88만원 세대를 미리 예견하듯 청년의 고통을 외면하지 말라고 하셨다. 90년대 초 한국 사회가 한창 성장에 취해 있을 때에는 ‘생명을 잉태하고 양육하며 보존하는 여성들이 이제 보다 적극적으로 반생명적인 세력들과 싸우며 연대하라’고 일갈하셨다. 죽임의 문화를 버리고 이제 생명의 역사를 써야 한다는 것이다. 선생님에게 정치는 가난한 이를 위한 것이었고 동네병원 의사 같은 것이다. 그렇게 민주화운동과 여성운동을 온몸으로 겪고 시민사회를 향해 ‘소수의 권리가 보장되고 시민의 참여가 국가운영의 기본원리가 되는 참여형 민주인권사회, 성에 근거한 왜곡된 남녀 역할의 차별이 존재하지 않는 평등사회, 중앙집권주의, 위계주의를 넘어서서 분권적 자치사회를 건설할 것’을 일관되게 주장하셨다.

환경사회정책연구소와 여성환경연대를 만드셨고 활동가들의 안정적인 활동 기반을 지원하기 위해 한국여성재단을 창립하셨다. 여성의 참여가 정치를 바로 세운다는 신념으로 후배들과 함께 살림정치여성행동을 조직하셨고, 네팔의 여성들을 돕기 위한 공정무역과 아시아위민브릿지 두런두런을 직접 챙기고 지원하셨다. 늘 현역을 꿈꾸셨던 선생님의 삶은 생명에 대한 존중과 실천적인 ‘살림’이었고 마지막까지 공들인 공간과 시간도 ‘살림’이었다.

선생님은 해마다 시민운동을 하는 후배들을 불러 손수 밥을 해주시며 행복해하셨고, 물 떠줄 시간에 자신의 일을 열심히 하라고 물 대접조차 받지 않으셨다. 생의 마지막에는 바쁜 후배들에게 피해될까 봐 문병조차 거부하셨다. 아마도 이렇게 선생님을 추모하는 모습을 보셨다면 화를 내셨을 것이다. 내 걱정일랑 말고 어서 가서 세월호를 구하라고, 물속의 생명을 우선 살리라고…. 선생님이 무어라 하실지 귀에 쩌렁쩌렁하다.

우리는 지금 세월호의 아픔을 앓고 있다. 유족들의 고통이 느껴져 온 국민이 웃지도 먹지도 잠들지도 못하는 한 달을 보냈다. 힘없는 국민 모두가 미안하다고 정말 미안하다고 말한다. 세월호를 수장시켰던 무능과 부패가 충격이었던 것은 우리가 이 사회의 찢어진 그물을 새로 짜기보다는 단순히 꿰매주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힘있는 사람이 가난한 이를 비웃고 생명보다 돈이 더 가치있다는 권력과 자본의 논리를 우리가 묵인해왔기 때문이다.

생명과 안전을 소중히 여기는 사회는 어떻게 가능한지 나는 묻고 싶다. 성장과 풍요, 경쟁에 대한 환상을 버리지 않고 어떻게 사회의 가장 소외된 이를 위한 안전망을 작동시킬 것인가. 권력을 감시하고 참여하는 풀뿌리 민주주의의 성장 없이 어떻게 가장 취약한 생명을 살리는 사회시스템을 만들어낼 수 있을까. 선생님은 떠나셨지만, 박영숙을 기리고 따르는 수많은 살림이들이 세월호 이후의 한국 사회를 치열하게 살아낼 것이다.

장이정수 여성환경연대 공동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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