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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냐면] 야한 옷에 대한 팩트? / 최종덕 |
성폭행이나 성추행으로 경찰에 잡혀온 아저씨들은 대부분 비슷한 항변을 단계적으로 한단다. 먼저 “나는 그런 적 없다. 나는 그런 기억이 없다”며 발뺌을 한다. 증거들이 너무 많아서 그 아저씨의 발뺌이 통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면 다음 단계 변명이 시작된다. “남자가 좀 그럴 수도 있지, 이게 문제라고 떠드냐?” 그러다가 상황이 심각해지면 “정말 이렇게 큰 문제가 되는 줄 몰랐다”고 꼬리를 내린다. 그리고 자신이 불리하다고 느끼면서 “여자가 짧은 치마 입고 꼬리를 치는데, 그럴 수밖에 없었다”고 변명을 늘어놓는다. 이런 상황에서 남성의 성적 권력을 정당화하려는 몸부림이 드러나고, 책임을 회피하는 비열한 모습도 동시에 나타난다.
서울대 의대 이윤성 교수가 “여자들이 야한 옷을 입고 다니면 성폭행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고 어느 강연장에서 말했다고 한다.(<한겨레> 5월28일치 18면) 성범죄자의 변명 중에서 네번째 단계를 정당화하는 것 같다. 그 교수가 말한 “야한 차림” 변론은 실은 오래전부터 남자들이 해오던 말투이다. 야한 차림에 책임을 전가하는 악습은 무슬림 권력자들이 여자들을 묶어두기 위한 수단으로 있어 왔으며, 원리주의 무슬림 정권이 들어서면서 더욱더 강화시켜 왔다. 무슬림 여자들이 머리에 쓰는 부르카는 눈 부위만 겨우 뚫어놓고 그나마도 망사로 가려져 있다. 히잡이나 부르카로 둘러싼 여성의 몸에서 슬쩍 보이는 눈썹과 발목을 갖고도 남성들은 그런 모습이 성범죄를 일으킨다고 심각하게 트집을 잡는다. 이러한 책임론은 남성 기득권의 횡포일 뿐이다. 인도에서는 옷가게 진열대에 야한 옷을 걸친 마네킹이 성폭행의 원인이라는 억지춘향의 논쟁이 지금도 일어나고 있다.
게다가 지식의 권력을 이용하여 “야한 옷” 책임론에 이론적 근거까지 있다고 당당히 말하고 있다. 야한 옷에 책임을 전가한 그 교수의 발언에서도 그런 모습이 나타났다. 기사에 따르면 자신의 발언은 “왜곡된 성 인식이 아니라 팩트에 근거한 진화심리학에 나온 얘기”라고 한다. 결론부터 말하건대, 그 교수가 말한 것은 팩트가 아니다.
필자는 ‘생물철학’ 혹은 ‘진화론의 철학’이라는 지식으로 밥 먹고 살고 있다. 그래서 필자도 진화심리학을 조금 아는데, 전세계 진화심리학 연구 성과 어디에도 “야한 옷” 논변을 정당화하는 논문이나 팩트는 없다. 물론 노출이 심하고 야한 옷을 입은 여자를 보면 남자들이 성적 자극이나 충동을 받는다는 일부의 진화심리학적 실험 결과는 있었다. 그리고 남성들의 혼외정사, 일부다처제와 한때 논란이 되었던 강간에 대한 진화론적 배경을 언급한 논문들도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인간 사회의 성적 일탈을 진화론으로 설명하려는 학자들은 혼외정사나 강간을 다 그럴 만하니까 그렇게 된 자연선택의 소산물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또 다른 부류의 진화생물학자들은 혼외정사나 강간의 현상을 생물학적으로 자연선택된 진화의 소산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인간 사회가 낳은 문화적 양상일 뿐이라고 말한다. 어느 주장이 옳은지 아직 확정되지는 않았다. 섹슈얼리티의 진화론자인 도널드 시먼스가 말하기를 일부 유인원을 제외한 동물세계에서는 강간이 이루어지지 않고, 이루어질 수도 없다는 기존의 관찰보고 팩트를 언급했다. 그 말을 뒤집어보면 남성이 행하는 강간의 진화생물학적 근거는 있을 수 없다는 말과 같다.
굳이 팩트라고 말하자면 한국 사회에서 성범죄의 원인으로 조사된 것이 있는데, 성범죄 원인으로 첫째는 성범죄에 대한 사회적 관대함이 65%라는 조사 결과다. 수많은 조사결과를 보면, 성범죄 가해자는 피해자와 이미 아는 사이였다고 한다. 한 조사를 보면 아는 사이의 가해자가 79.3%이며 모르는 사람이 9.8%, 기타가 10.9%라고 한다. 그 모르는 사람도 실은 계획된 범행을 했다는 점이 더 중요하다. 길거리에서 우연히 만난 짧은 치마, 야한 옷을 입은 여자에 대한 성범죄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한국의 성범죄율은 이제 미국 다음으로 세계 2위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한국은 2001년에서 2010년 10년 동안 성범죄가 2배로 증가한 기이한 사회다. 이런 우리의 자화상을 치유하기 위하여 진화심리학의 없는 팩트를 거론하며 문제를 희석시킬 것이 아니라, 문제의 본체인 남성성 권력을 스스로 내려놓는 것이 중요하다. 그렇다면 성범죄만이 아니라 우리 사회에 만연한 비리와 안전불감증의 문제도 어느 정도 해소될 수 있다.
최종덕 상지대 교수·과학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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